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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레터 Oct 02. 2024

연재소설 23화 - 지옥 속에 갇힌 아이

미스테리 연재 소설 -텔레그림 성착쥐물 피해


선희는 그동안 영진이 조직에게 받은 협박 메시지와 통화 내역, 그리고 텔레그램에서 보았던 선정이의 동영상의 캡처본까지 모든 것을 저장해 두었다고 했다.      


“그 언니 동영상 1건이 아니에요. 제가 찾은 건 2개인데 지난 2월에 언니가 그렇게 가버린 후에 혹시 몰라 캡처했어요. 죽어버리고 싶을 때마다 언니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놈들에게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나도 이 언니처럼 되는 건가? 그러다 깨달았어요. 숨고 피해서는 절대 이 지옥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뭐든 도울게. 극단적인 생각하면 안 돼. 니 말대로 움츠리고 두려워하는 건 녀석들이 짜놓은 판대로 끌려다니는 거야.”

“맞아요. 놈들이 나에 대해 모르는 게 하나 있어요. 예전에 지하 단칸방에 살 때 매일 바퀴벌레랑 곱등이 때려잡는 게 일이었어요. 밤에 주전자에 있는 물 따라 마시다가 바퀴벌레 삼킬뻔한 적도 있어요. 누구보다 잘 알아요. 내 인생 내 문제, 누가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거. 인생은 셀프, 때려잡든, 같이 죽든 방법을 찾을 거예요.”



왜인지는 모르겠다. 선희와 헤어진 후 발걸음은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선희는 작지만 총명하고 강단 있는 아이였다. 놈들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서 힘이 되어 달라 했다. 텅 비어 있는 토요일 저녁 도서관, 창가에서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지는 햇살 속에 찰나의 영롱한 초록빛을 발하고, 하나둘 저녁 어스름 속으로 물러나고 있는 산책로의 아름드리나무들. 흙먼지 날리는 바람 사이로 패딩 모자를 꾹 눌러쓰고, 푸르스름한 맨다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 휘청휘청 걸어가던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

“선정아!”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텅 빈 운동장에서 선정이가 뒤돌아본다. 아득히 먼 곳을 응시하는 무색무취의 표정. 또 한 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그 시간, 선정이는 이미 죽어있었구나. 엄마의 죽음 앞에 한없이 무너져 내리던 내 어린 영혼처럼.


-그 엄마 사고 난 날도 친구 집에서 밤새 게임했다는데...죽은 엄마만 불쌍. 왜 사니?

-중간고사 기간에도 죽어라 게임만 하는 게임중독 중 2 ? 와..답 없다. 그 엄마 화병으로 죽은 거야.

-ㅉㅉ. 아들이 지 애미 잡았구만...     


하루종일 귓가를 맴돌던 낄낄대는 웃음소리. 스크린 너머에서 서서히 영혼을 옥죄어 오던, 검은 공간을 빈틈없이 채운 발광(發光)하는 눈동자들. 영혼이 짓이겨 질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 말, 말, 말.... 그날 너는 마지막 호흡을 가까스로 모아 나를 만나러 온 것이구나. 난해한 부호 같던 선정이의 마지막 편지가 이제야 내 마음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파우스트>의 결말은 틀렸어.

메피스토보다 영혼의 거래를 한 파우스트가 더 사악한데 왜 구원을 받았을까?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레트헨의 모든 것을 앗아간 파우스트.

나는 그놈과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거야.

은호야, 약속한 것처럼 내 얘기를 들어 줘. 그리고 나를 지워 줘. 부탁해.-     



선정이와 마지막 대화를 나눴던 그 자리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선희가 스마트폰으로 보내온 선정이 동영상의 캡처본을 열었다. 지옥 속에 있는 선정이가 나를 바라본다.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 안, 샤워 중 살짝 뒤돌아보는 선정이의 얼굴. 또 하나의 캡처본은 얇은 슬립 차림으로 침대에 잠들어 있는 모습이다. 캡처본에는 <희귀템, S고 전교 1등 전라 동영상!>이라는 친절한 자막까지 쓰여 있다. 부르르 스마트폰을 쥔 손이 떨려왔다.     


’학교처럼 미스터리하고 다이나믹한 곳이 또 있겠어? 멀쩡하던 전교 1등도 자유 낙하해 죽어 나가는 곳이 학굔데 뭔 일인 듯 안 일어나겠어? 도대체가 지루할 틈이 없는 학교가 난 좋더라구.‘     


뱀처럼 징그러운 영진이의 음성이 떠올랐다. 자신을 지워달라는 부탁을 남긴 선정이에게 이제 내가 답장을 쓸 차례다.      



금요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피로감 때문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수시로 ’요녀석!‘을 외치는 익숙한 게임 유튜버 페이커의 목소리, 요란한 BGM과 쉴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지훈이가 내 책상 앞에 앉아 바나나를 먹으며 게임 유튜브 채널을 보고 있었다.

     

“아~ 피곤해 죽겠는데. 똥방 박사 뭐하냐?”

“아버님 지난밤에 배탈 나서 힘들다 하시길래 편의점 새벽 대타 뛰어드렸지. 아드님은 온종일 전화두 안받구 밤엔 시체처럼 뻗어 주무신다더라, 뭔 일 있지?”      


오전 10시. 안 그래도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지난밤 선민 선배에게 전화해 만날 약속을 해두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지훈이와 옥상 캠핑존으로 나갔다. 편의점 비닐봉지에 담아온 핫바와 바나나, 머핀, 흰 우유를 지훈이가 테이블 위로 우르르 쏟아놓았다. 우유를 마시며 어제 선희와 있었던 일을 지훈이에게 들려주었다.     


“에휴~ 그 새끼들 제정신 아닌 거 알면서 그 밤에 혼자 가? 차은호, 몸 사려. 아버님한테 다 말해버린다.”

“안 그래도 아빠한테 이실직고하고 SOS 쳐야 할 판이야. 선정이 억울함 다 밝혀야지. 한가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건, 선정이 동영상이 유포된 원인이 뭔지 모르겠어. 설마 도박을 했을까? 빚이 생겼더라도 선정이네 재력 정도면 충분히 커버 가능했을 텐데 말야.”

“속사정은 모르지. 순진한 동호가 그렇게 도박에 빠져들지 누가 알았겠어? 예전에는 최소 민증 있는 성인이 지 발로 도박장을 찾아가야 도박을 할 수 있었는데, 이젠 스마트폰 열면 1초 안에 도박장에 접속되니 시작은 쉽고 끊는 건 존나 힘들어. 물리적인 경계가 아예 사라졌으니까. 더 무서운 건 도박은 절대 혼자 망하지 않아. 가족은 당연하고 주변 사람들 돈까지 빚 갚는다고 진공청소기처럼 싹 빨아들여 도박으로 말아먹은 다음에 더 이상 돈 나올 구멍이 없으면 정신병원 가거나 자살하거나 선택지가 딱 두 개더라구. 뉴스에 나오는 갑자기 자살한 군인, 회삿돈 횡령한 직원 그거 캐보면 결론은 다 도박 빚이야. 돈 잃고 완전 꼭지 돈 거지. 도박 끊는 거보다 죽었다 살아나는 게 쉬울걸? “  

”게임 중독이랑 뭐가 다를까 했는데 주변까지 지옥으로 싹 다 쳐넣는 게 정말 끔찍하다. 생지옥이구나. 근데 내가 아는 선정이는 그렇게 어리석은 친구가 절대 아냐. 선희라는 애도 스스로 도박에서 빠져나왔구. 여하튼 선희가 완전 직진형 성격이라 자료를 싹 모아서 고소할 생각 같은데 선정이 사건도 같이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호랑이 굴로 들어가서 굴 앞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겠다... 선희, 대단하다. 선정이 집에 알리고 동호 설득해서 같이 고소 들어가면 시너지가 있을 거 같아. 아, 그리고 지난주 배달하다 도영이를 만났어.“

”한도영?“

”화양구랑 서울 맞닿는 곳에 택지개발 중인 동네가 있거든. 이제 아파트 올리기 시작한 썰렁한 동네인데 거기서 핸드폰 매장을 하더라구. 자정 가까운 시간 치킨 배달이 있어 허허벌판에 뭐가 있나 했는데 도영이 매장이었어. 양복 쫙 빼입고 딴사람 됐더라구. 지난번에 동호가 훔친 에어팟 가져다 팔아주는 핸드폰 대리점 있다 하지 않았어? 그게 도영이 아닐까?“     


학폭 사건으로 영진이와 함께 중3 때 화양구를 떠나 강전 갔던 한도영. 교활하기로는 영진이보다 한 수 위인 한도영이 단짝인 영진이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니  두 놈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선희의 등장과 함께 뭔가 엉킨 실타래가 하나하나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낮 12시, 약속 장소인 화양 성당 앞 작은 카페에서 선민 선배와 만났다. 꼭 전할 이야기가 있다는 지난 밤, 나의 전화에 망설이듯 한동안 말이 없던 선민 선배. 훤칠한 키에 하얀 얼굴, 그리고 지적인 느낌이 드는 각진 턱, 선정이 장례식장 때와 달라진 것은 숏컷이었던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것이다.      


“선배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뭐..그럭저럭. 이번 여름방학에 방글라데시 의료봉사를 갈 거라 준비 중이야. 다음 주에 떠나. 고3이라 한참 바쁠 텐데 무슨 일이지?”

“지난번에 연락드렸을 때 동생 일에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말씀하셨는데 죄송합니다. 선정이가 저에게 남긴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어요. 사고가 있던 날 저녁에 선정이가 저에게 전달한 편지예요.”     


선민 선배는 편지를 꺼내 읽고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3개의 낮은 빨간 벽돌 건물이 연결되어 아담한 느낌이 드는 화양 성당. 가운데 건물, 삼각형 지붕 아래 기도하는 성모의 모습을 담은 스탠드 글라스가 정오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은은한 종소리와 함께 미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성당 마당에서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주일에는 항상 선정이랑 같이 미사를 드렸어. 중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허락해준 유일한 사적인 시간이었지. 학업 때문에 같은 고통을 겪는 동생이 늘 안타까웠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 그저 얼른 그 지옥 같은 트랙에서 벗어나기만 바랬지. 선정이가 대학생이 되면 축제도 같이 가고, 맥주도 마시고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사포를 쓴 여학생 사이에 그 녀석이 없다는 게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아.”     


선정이에 대한 손동호 원장의 사이버 모욕 사건 때문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선민 선배를 무심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메시지 너머의 슬픔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나 보다. 슬픔으로 일렁이는 그의 두 눈을 보며 어떻게 이 엄청난 일을 전해야 할까 고민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선정이를 평안하게 보내주고 싶은 사람은 가족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픈 이야기를 가져와 죄송해요, 선배님. 이 편지의 의미를 사실 지금까지 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선정이 동영상이 텔레그램 비밀 채팅방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됐어요.”     


스마트폰 앨범에서 선희가 나에게 주었던 선정이 동영상의 캡처본을 선민 선배에게 보여주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넘겨보던 선민 선배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테이블 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선민 선배가 물었다.     


“이게... 도대체...누가 이런 일을 한 거지? 우리 선정이한테?”

“최초 유포자가 누군지는 저도 몰라요. 다만 학교 안에 도박, 마약과 연관된 조직이 있어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정이는 자기를 지워달라는 부탁을 남겼어요. 경찰 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알겠어. 동생 일에 신경 써줘서 여러모로 정말 고마워. 코로나 전에 병원 리모델링이랑 최신 의료기에 큰돈을 투자해서 아버지가 지금 여러모로 힘드셔. 아버지 쓰러지시지 않게 잘 말씀드려 진행해볼게.”     


직진형 아이 선희는 인터넷으로 자료를 엄청나게 조사해 스스로 경찰에 제출할 고소장을 작성했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같은 시기 선정이네 집에서 사건 수사를 경찰에 의뢰하면 이제 모든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오랜만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던 수요일 늦은 밤, 선민 선배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버지가 딸자식 알몸이 세상 구경거리가 된 사실, 들쑤셔서 다시 이목 집중시키고 싶지 않으시다고 해. 그냥 가슴에 다 묻겠다고. 정말 고맙지만, 은호도 선정이 일은 잊어주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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