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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diary jenny Aug 30. 2021

[픽션12]걱정에 진심인 걱정가득 K이야기

걱정은 벚꽃향기를 타고...




나 이거 해도 될까? 뭘 망설여, 그냥 해.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 무슨 걱정을 그렇게 자주 하냐? 그럼, 걱정이 안 되니? 그러니깐 넌 힘든 거야. 음, 그건 그래. 걱정하지 말고 그냥 좀 해. 그럴까? 제발 걱정 좀 하지 마. 너는 그게 쉬워도 나는 쉽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옆에 있는 거잖아. 그래, 고마워.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봐. 응, 그래야겠어. 그래, 그래. 그런데, 걱정되는 부분이 또 있는데. 야, 그새 또 걱정이냐? 매번 이런 식이다. 내 머릿속은 복잡하다. 너무 복잡해서 어떤 날은 터질 것 같다. 아니, 터졌는데 다시 붙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붙긴 했지만 제대로 붙지 못한 걸까. 상태가 좋지 않다. 나는 걱정이 많다. 걱정에 둘러싸여 산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나도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걱정 한 가득한 내 모습이 싫어서 머리를 마구 쥐어박는다. 죽어라 죽어, 이 걱정들아. 나는 대체적으로 잘 살아가는데, 큰 문제없이 사는데, 평범하지만 편하게 사는데, 걱정이 많아서 그게 걱정이다. 20년 전 하늘고등학교 2학년 8반 우리 교실. 벚꽃 향이 진동하는 아주 아름다운 날씨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반에는 일진의 측근 한 명이 있었다. 그 일진의 측근은 호들갑스러웠다. 반 친구들은 그녀에게 간과 쓸개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모두들 그녀의 눈치를 본다는 말이다. 그녀의 별명은 호들갑녀. 오늘도 그녀는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그녀의 호들갑은 똥 멍청이 같은 호들갑이 아니라 누구나 인정하는 멋대가리 가득한 호들갑이다. 그녀의 한 마디에 모두들 깔깔깔 넘어간다. 웃기지도 않는데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웃는다. 호들갑스러운 상황도 아닌데 아이들은 너는 호들갑의 끝판왕이라며 그녀에게 엄지 척을 날린다. 사실은 나도 배시시 웃으며 그런 시늉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니까. 어느 날 갑자기 교실이 술렁거린다. 어, 이상하다. 지갑이 어디 간 거야? 야, 내 지갑 본 년? 혹시 누가 손댄 건 아니겠지? 이 신성한 교실에서 손버릇 나쁜 년 나오면 내 손에 당장 뒈진다? 그녀의 한 마디는 막강한 파워를 싣고 있다. 가방 다 꺼내. 웅성웅성. 아이들이 놀란 토끼눈으로 두리번거린다. 눈깔 깔고 가방 꺼내, 다 죽을래? 나도 합류했다. 여기저기서 가방 여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자라락, 주르륵, 지지직, 찌이익.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며 일진의 측근인 호들갑녀가 애들 가방을 마구 뒤진다. 아,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문제없다. 나는 호들갑녀의 지갑에 손을 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머나, 난 몰라. 이를 어떡하지? 순간 나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나 어떡해. 내 가방 속에 지갑이 있다. 지갑. 지갑이 있다. 지갑이 있는 것이다. 아, 잠깐. 내 가방 속 지갑은 호들갑녀의 것이 아니다. 내가 놀란 이유는 다른 차원의 놀람이다. 그건 바로 우리 반 또 다른 친구인 P와 연관되어 있어서다. P와 똑같은 초록색 지갑이 내 가방에 있다는 사실. P와 똑같은 초록색 지갑. 그리고 또, P와 똑같은 스터디 플래너와 P와 똑같은 만년필. 이것들이 내 가방 속에 곱게 자리하고 있다. P를 따라하고 싶은 마음에 똑같은 걸 샀던 나. 그걸 고이고이 가방 속에 넣은 채 가지고 다니던 나. 내 얼굴은 달아오른다. 하필 벚꽃향기는 왜 이리 진한 건지. 무릎이 꺾일 듯 말 듯 삐걱거린다. 다행히 호들갑녀의 레이더는 피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 P의 레이더에 딱 걸리고 말았다. 아, 이를 어쩌나. 얼굴이 활화산처럼 뜨거워졌다. 다른 친구들은 그 순간 나의 당황스러움을 당연히 모른다. 건너편 자리에 있던 P는 자기와 똑같은 흔치 않은 스타일의 초록 지갑과 스터디 플래너와 만년필을 나 역시 가지고 있는 걸 보았다. 눈이 서로 마주친 순간 그녀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아니, 웃어 주었다. 아니, 웃음을 선물해 주었다. 그녀의 웃음은 흔하디 흔한 웃음이 아니라 나에게 주는 웃음이라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나에게는 어쨌든 그랬다. 두 눈은 내리 깔렸고 입술은 말려 들어갔으며 귀는 먹먹함으로 닫혀버렸다. 그날, 야간자습을 마친 후 추파춥스 사탕을 핥아먹으며 302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벚꽃 향기는 솔솔 콧 속으로 들어왔고 사탕의 달콤한 맛은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한창 피어나는 내 몸과 마음을 강하게 자극하는 벚꽃의 향기와 사탕의 달달함. 아, 좋다. 순간 익숙한 실루엣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안녕? 으응, 응. 너 302번 타니? 으, 응. 내일 나랑 걸어가자, 가능하니? 내일? 응. 왜? 내일 토요일이니까 그냥 좀 걷자. 그, 그럴까. 1시에 여기서 보자. 으응, 그그그래. 안녕. 응, 안녕.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벚꽃은 왜 벚꽃인가. 사탕은 왜 달달한가. 나는 왜 302번 버스를 타며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오만 가지 생각으로 밤을 지새운 그날은 벚꽃 향기가 가장 진한 그런 아름다운 밤이었다. 벚꽃이 진다. 아니, 벚꽃은 졌다. 푸르른 잎사귀가 돋보인다. P는 모르는 게 없다. 신기하다. 같은 나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나랑 다를까. P는 술을 넘기고 나는 사탕을 핥는다. P는 술이 달다고 한다. 거짓말. 달달한 건 사탕이지. 술은 쓴 맛이고 사탕은 단 맛이잖아. P는 모르는 게 하나도 없지만, 딱 두 개는 모르는 것 같다. 술은 쓴 맛이고 사탕은 단 맛이라는 것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P를 정말 좋아하고 의지한다는 것. 아니, 알 수도 있다. 아니, 알 것이다. 아니, 안다. 아니, 알까? 아니, 알 텐데. 아니, 알리라. 아니, 알아야 한다. 아니, 모를 수가 없잖아? 아니, 아니, 아니. 나는 P가 참 좋다. P는 세상 최고의 내 편이다. P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에게 P는 그런 존재다. 너 또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냐? 앗,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니? 흠, 무섭군. 걱정 좀 하지 말고 그냥 해. 신중한 성격이라고 해줄래? 아니지, 신중한 게 아니지. 맞다니까. 넌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거야. 넌 어떻게 그렇게 다 아니? 나는 세상에 딱 한 가지, 술은 쓰다는 것과 사탕은 달다는 것만 모를 뿐이야. 헐. 제발 그냥 좀 해. 흐흐흐, 알았어. 칫. 걱정 좀 하지 마. 응. 내가 곁에 있잖아. 그래, 알겠어. 나 믿지? 응, 믿지. 그래. 고마워. 응. P는 19년 전 오늘, 벚꽃이 만개한 19년 전 오늘, 추파춥스를 먹고 있던 19년 전 오늘, 만나서 같이 걷기로 한 19년 전 오늘, 하늘로 갔다. 딱 19년 전 오늘, 벚꽃 향기 가득한 19년 전 오늘이다. 얇고 조그만 벚꽃 잎 한 가득 스터디 플래너에 끼워둔 채, 진한 검정 만년필로 나에게 인사를 남긴 채 19년 전 오늘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야, 걱정 좀 하지 마. 네가 계속 걱정하면 나는 널 끊임없이 따라다닐 거야. 진짜야, 진짜라고.’ P가 남긴 만년필 메모에는 벚꽃 향기가 아로새겨져 있다. 오늘도 P는 나를 따라다닌다. 나의 걱정은 끝이 없고, P의 잔소리 역시 끝이 없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 잘하고 있네. 근데, 내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면 넌 어떻게 돼? 글쎄, 나는 이제 너에게 필요 없어지겠지? 안돼, 안돼. 음. 나 계속 걱정할 거야. 뭐? 네가 없는 나보다 걱정으로 찌든 내가 낫단 말이야. 으음. P야, 술은 쓰고 사탕을 달달해. 그래. 쓸데없는 걱정은 좋지 않지. 그래, 맞아. 그렇지만 나는 계속 그러고 싶어. 그래. 우리 헤어지지 말자. 그래, 그러자. 계속 걱정해도 되지? 휴, 그래라 그럼. 벚꽃 잎이 흩날리는 오늘, 나는 추파춥스를 핥아먹으며 벚꽃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오늘도 쓸데없는 걱정거리 하나 만들어 품은 채 말이다. P가 곁에 있는  더 이상 걱정이란 없지만 오늘도 걱정거리를 찾아다니는 나는, 걱정에 진심인 걱정스러운 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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