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이 이야기하는 삶의 목적
우리는 꿈이 없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어른들이, 혹은 누군가가 “너는 꿈이 뭔데?”하고 물었을 때 “저는 꿈이 없어요.”라고 대답하는 건, 그런 답을 당당하게 하는 것 자체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꿈이 없다고 하는 순간 상대방으로부터 동정 어린 시선을 받거나 한심한 사람이라는 도장이 찍힌다. 꿈이 없다는 게 정말 그렇게 상대의 걱정을 사야 할 일일까? 짐작했겠지만 이 글을 쓰는 나는 꿈이 없다. “요즘 애들은 꿈이 없어.”와 같은 딱지를 피하기 위해서 “아직은” 이라든지, “꿈을 찾는 중”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은 ‘꿈’이라는 단어를 ‘목적’ 대신으로 사용한다. ‘목적’이라고 말하면 딱딱하고 차갑게 느껴지니까 목적을 대신해 ‘꿈’이라는 따뜻하고 희망찬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성공한 위인들이 남긴 꿈에 관한 명언을 배우고 크레파스를 쥔 서툰 손가락으로 미래에 꿈을 이뤄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을 삼 등신으로 그려보면서 꿈과 목적을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삶에서 목적이 중요해진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 것처럼 삶을 산다. 삶이라는 사진첩에 들어갈 아름다운 하나의 순간을 위해서 피사체가 될 예쁜 장식과 소품들을 준비하고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한다. 특히 사진첩의 마지막에 들어갈 사진은 매우 중요해서 이 마지막 사진을 위해 삶 전체와 나머지 사진 모두를 바치는 사람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반면 우리의 삶은 사진첩보다는 영화에 가깝다. 영화도 초 단위의 프레임이 연속적으로 영사돼 구성된다는 면에서 보면 프레임으로 끊어지지 않은 우리의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삶은 사진첩에 들어갈 몇 개의 순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지막 단 하나의 사진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삶은 무한한 프레임, 무한한 순간들로 이루어져서 스크롤을 내리는 지금도 우리의 삶은 흘러가고 있다. 그럼에도 삶의 일부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삶의 대부분을 없는 것처럼 취급한다는 면에서 사후세계를 위해 전재산을 털어 바친 정신 나간 이집트인들의 발상과 비슷하다. 나는 사람들이 삶의 사진, 삶의 표면, 삶의 미분 값, 삶의 코끼리 다리만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삶의 전체를 아껴주었으면 좋겠다.
다음은 영화 ‘안녕 헤이즐’에서 영화가 끝나갈 무렵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하는 대사의 일부다.
“... 난 수학자가 아니지만 이건 알아요. 0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어요. 0.1도 있고, 0.12도 있고, 0.112도 있고, 그 외에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죠. 물론, 0과 2 사이라든가, 0과 백만 사이에는 더 큰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을 거예요.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커요. 저희가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 줬어요.
전 제게 주어진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를 원하고, 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길 바라요. 하지만 거스, 내 사랑. 우리에게 주어졌던 작은 무한대가 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넌 나에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해. 널 너무 사랑해.”
우리 삶에 목적이 있을까? 얼마 전 직장에서 존경하는 상사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보다 한참 경험도 나이도 많은 분이었지만 넓은 마음과 옳은 견해를 가지고 계신 분이어서 3년간 근무하고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흔하지 않은 상사였다.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꿈을 이룬 분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소장님께서 목적을 이루고 나니 이상하게 허무감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목적을 이룬 많은 사람들이 성취감 다음에 공허함을 경험한다. 대학 입학을 바라보고 12년간 공부만 하다가 수능이 끝나고 드디어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나, 연애 끝에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한 이후 자신의 꿈꿔온 가정을 꾸린 사람들처럼 그 목적이 오래 바라 온 것일수록 목적을 이룬 다음 ‘이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깊어진다.
영화 ‘소울’에서 꿈에 그리던 공연을 마친 남자 주인공은 공연장을 나서며 말한다.
“저는 이 순간을 평생에 걸쳐 기다렸는데, 뭔가 이거랑은 기분이 다를 줄 알았어요.”
그가 존경해 온 가수 도로시아는 의문스러워하는 주인공에게 한 물고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어린 물고기가 나이 많은 물고기에게 물었어. “안녕하세요, 저는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을 찾고 있어요.”
“바다?” 나이 많은 물고기가 말했지.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바다야.”
“여기요?” 어린 물고기가 다시 말했어. “여긴 그냥 물이에요. 제가 원하는 건 바다라고요.””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디즈니사의 ‘소울(Soul)’이라는 영화는 이 주제를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풀어냈다. 영혼들은 이유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재즈 피아니스트의 인생과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영혼을 통해 보여준다. 목적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우리는 목적을 둠으로써 기쁨과 실망 같은 삶을 삶답게 하는 감정들을 느끼고 때로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 가지 목적만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도 없다. 목적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하나의 목적을 이룬 다음 자연스럽게 다른 목적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그 전체와 무한한 순간들이 각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내 꿈은 약사가 되는 거야.”라고 (혹은 특정 직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약대에 입학해 6년 뒤에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장과 면허증을 따는 지점을 삶의 전부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약사에 대해, 약사가 된 이유와 약사가 어떤 직업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점을 먼저 이야기해둔다.
(다음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