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몇 년 전 그림을 배우겠다고 어반 드로잉 클래스에 가입한 적이 있다. ‘어반’은 도시, 일상이라는 뜻이고, ‘드로잉’은 그리다, 스케치하다라는 뜻이다. 즉 어반드로잉은 일상을 그린다라는 뜻이다. 일상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순간순간 담는 것이다. 펜과 종이, 물통, 수채화 물감 등 필요한 재료들을 맘먹고 구비했었다. 배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2시간을 꽉 채워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갔지만 늘 시간이 부족했다. 미완성된 부분은 다음 주 과제로 남겨졌다.
클래스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심화 과정을 모집했지만 난 등록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요한다는 것이었다. 하나의 기술을 배우고, 완성도를 높여가기 위해서 쉬운 것은 없다. 나는 언젠가는 다시 도전하리라 마음먹고 다음을 기약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19세기 중반이 되어 ‘사진’이 ‘그림’을 대체해 버렸다. 그때부터 그림이란 예술가만 그리는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러스킨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실에 일찍이 분노했다. 아름다운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사진 찍기에 몰입된 관광객들을 그는 규탄했다. 또한 토마스 쿡이 1862년에 시작한 유럽을 기차로 일주일 만에 돌아보는 관광 상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노했다. 그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쫓겨 조급하게 찍고 소비해 버리는 여행에 대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래서 사진 대신 그림을 그리며 느린 여행을 하자고 사람들에게 권했다.
중세 시대에에는 열정적인 순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느렸는데도 더 느리고 느린 여행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떤 기구나 동물의 도움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두 발로만 걸었다. 북부 유럽에서 산티아고에 위치한 사도 성 야고보의 유적지까지는 8개월이 걸릴 수도 있었다. 요즘에는 산티아고에 한 달 코스로 많은 이들이 다녀온다. 한 달도 현대인들에게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직 사이나 휴직, 방학, 은퇴 등의 시간이 주어질 때에만 이 시간도 겨우 낼 수 있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거나 긴 시간을 낼 수 없는 경우에는 한 달도 더 줄여 속성으로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순례자들은 봄에 떠나도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의 여행 목적 중 한 가지는 후회스러운 과거를 잊기 위해서였다. 즉 속죄였다. 지금도 그때보다는 짧은 일정임에도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내적 변화를 듣곤 한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이렇게 느리고 힘든 여행을 굳이 사서 하는 이유는 자신의 과거와 거기에 얽매여 있는 내적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다. 아무런 수고 없이 너무 손쉽게 관광 상품을 구입하고 편리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 좋은 것만이 아니다. 그저 유명한 어느 곳에 갔다 왔다는 것을 자랑하기에 바쁜 것은 아닌지, 일상의 빈 여백을 채웠다는 안도감으로 만족하는 건 아닌지, 느리고 불편하지만 나를 찾아가고 있는 여행인지 되물어 봐야 한다. 100여 년 전에 이런 변화를 미리 꿰뚫고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낸 러스킨의 비판이 울림이 되는 지금이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나에게 자그마한 시간과 재정적 여유가 주어진다면 패스트 여행이 아니라 슬로우 여행을 준비해보고 싶다. 결국 여행의 질은 얼마나 여행 경비를 썼고, 얼마나 유명한 여행지를 갔다 왔는지보다 그곳에서 만난 사물과 사람들과 얼마나 진정한 교감을 했는지에 있다. 여기에서 나의 시선, 태도는 새로운 자극을 받고 변화를 낳을 것임을 알기에. 빠름과 조급함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