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마음 Oct 17. 2023

질문하며 살기

죽음 앞에서 당당하려면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숲으로 갔다. 인생의 본질적 사실만을 직면하려고, 삶이 가르치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리고 임종의 순간에 내가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까 봐 숲으로 갔다. _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중에서      



AI,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다. 아이나 어른 모두 초등 1학년처럼 배움에 있어서는 같은 출발선에 서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주요 대학의 자질이 되며,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어른들 또한 평생 배움을 각오해야 한다. 이를 돕기라도 하듯, SNS를 통해 연결된 다양한 커뮤니티가 쉼 없이 우리를 초대한다. 내 카톡 창에도 여러 개의 커뮤니티 단톡방이 나열되어 있다. 지금도 수 개의 공지들이 쉴 새 없이 올라온다. 나는 그 방들을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있다.      


늘 새로운 배움을 추구하는 나는 혹 내가 모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몇 개의 커뮤니티 방은 기웃거리기도 했다. 새로운 배움은 삶의 경계를 넓혀 주었지만, 쉼 없이 돌아가는 시간 설계는 나를 생기 있게 하기보다는 갉아먹는 느낌이 가끔은 들곤 했다. 어느 정도의 주도적인 시간 사용은 목표를 이루는 데 좋지만, 여백이 없을 정도의 분초를 다루는 삶은 오히려 자신을 지운다.     


책을 읽다가 소로의 문장에 잠깐 정신이 번쩍 든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임종의 순간에 제대로 산 것이 아니었음이 판명 난다면 얼마나 허무할지 하고. 가끔은 죽음을 생각하며 현재를 질문하는 행위는 매우 의미 있다. 소로처럼 자유를 찾기 위해, 인생의 본질을 더욱 알기 위해 지금 당장 숲으로 달려갈 수는 없지만, 매일 조금씩 읽고 쓰며 헛된 삶으로 결론짓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2년 2개월을 숲에서 산 소로와 비슷한 실험을 한 약초 연구자가 있다. 《야생의 식탁》의 저자 모 와일드이다. 그녀는 1년간 마트에 가지 않고 오롯이 야생에서 채취한 재료로만 생을 유지한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춘 시기에, 더 이상 기후 위기로 인한 지구의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실험을 감행했다는 그녀. “자연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지구의 단절을 치유할 방법”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책의 가장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을 남긴다.      



“나는 궁핍과 고난을 각오하며 이 한 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오히려 풍요로움이었다.”     



소비와 단절된 채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실험하기로 한 그녀는 일 년 동안 궁핍과 고난을 각오했지만, 자연에서 오히려 무한한 풍요로움을 경험한다. 체중이 30kg가량 줄었으며, 몸과 마음이 되살아났다. 한 해에 100~350종의 식물을 섭취하던 인간은 오늘날 일일 칼로리 섭취량의 절반 이상을, 밀, 옥수수, 쌀이라는 단 세 종류의 곡물에서만 얻는다고 한다. 현대인이 겪는 병들은 상당 부분 빈곤한 식단으로 인한 영양실조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는 오랜 기간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고 누렸던 기억을 깡그리 지우고, 아주 적은 것만을 의지하며 겨우 생존케 한다. 이 불균형은 지구를 파괴하고 이제 인류와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고 있다.     


가끔 생각한다. 읽고 쓰는 삶으로 삶을 성찰하고 질문하며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만, 이 또한 공허함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최은영 단편 <몫>에 나오는 희영의 다음의 말이 들려오기도 한다. 그녀는 글쓰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지만, 사회 활동가로서 살아가며 다음의 말을 건넨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란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 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중략)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소로와 모 와일드처럼 현실과 단절된 채 숲에서의 삶을 실험하지만, 그 삶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분업화와 파편화로 깨어진 삶이 아닌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서 생생한 대지의 기운을 받았던 그 영감이 전해진다. 한편으로 아낌없이 베풀었던 자연을 함부로 대해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곳곳이 쑤시고 아픈 지구의 앓는 소리 또한 들려온다.      


그동안 현장에서 나름 활동가의 삶을 살아왔기에 스스로 지금의 삶을 안위하지만, 소로와 모 와일드, 희영의 글을 통해 몸과 마음, 지성의 조화로운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정말 제대로 읽고 쓰고 있는지? 읽고 쓰는 삶이 몸을 배제한 채 허공을 맴도는 지성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활동가로서의 삶도 내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금세 지치고 허무해질 수 있음을 알기에 읽기와 쓰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오늘도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여러 공지를 잠시 바라보지만 이내 창을 닫는다. 소화하지 못한 채 쫓기듯 듣는 강의들은 자신과 괴리된 채 그저 휘발되어 버림을 알기에. 그리고 내 것에 집중해 본다. 그저 자기만족적인 읽기와 쓰기가 아니라, 현실의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읽기와 쓰기, 몸과 마음의 조화를 이룬 읽기와 쓰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외면하지 않는 읽기와 쓰기를 하고 싶다. 그런 삶을 살아낼 수만 있다면 죽음 앞에 조금은 당당해지지 않을까 하고.     

매거진의 이전글 쓸모없음의 유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