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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Oct 29. 2023

쓸모없음의 유익

마음을 잃지 않도록





쓰는 것은 가끔 거를 때도 있지만 매일 읽고 쓴다. 매일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 평일 새벽에 열어드리는 줌방에서는 한 권의 책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고 있다. 내 책상 위에는 협찬받은 책, 읽고 싶은 책, 가끔 들쳐 보아야 할 책 등 이번 주에 읽어야 할 책들이 한가득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쌓여 있는 책에 전혀 마음도 눈길도 안 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책을 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려놓고, 그저 내 앉은자리 바로 옆 책장을 쓱 둘러본다. 이 책장에는 이미 읽었던 책들이 대부분인데, 언젠가 한 번 더 읽고 싶은 책들로 진열되어 있다. 20여 년 전에 읽은 책도 있고, 10여 년 전에 읽은 책도 있고, 얼마 전에 읽은 책도 있다. 


어느 날 새벽, 내 책과 공저 책 출간 작업으로 약간은 지쳐 있어서인지 새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려 내 옆 책장을 스캔한다.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라는 질문은 어느새 ‘지금 나에게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말해 줄래?’로 바뀌어 있다.      


그렇게 무심결 손에 가 닿은 책이 헨리나우엔의 『고독』이다. 헨리 나우웬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넘나드는 신학자이다. 그의 책들은 대부분 얇아서, 거의 소장하고 있음에도 책장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한때 애정했던 작가로 마음이 분주하고 복잡할 때 그의 책을 가만히 읽어가다 보면, 존재를 찾게 하고, 중심을 잡게 해 준다.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기에 깊이가 있다. 몇 년 동안은 그의 책을 거의 들쳐 보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메시지, 내용은 거의 알고 있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 책도 무지 얇다. 그의 책 중에서도 아마 가격도 가장 착하리라. 구입한 지 10여 년도 훨씬 지난 책인 듯한데, 당시에도 책값이 매우 쌌다. 지금 살펴보니 2,000원이다. 이 책을 마음 가는 사람에게 선물하고자 여러 권 구입해 놓았다. 책장 어딘가에 흩어져 있지만, 아직 몇 권이 남아있다. 발행일은 1983년, 지금이 2023년이니깐, 40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이 나에게 간택당한 이유는 새벽 한 줌의 시간에 읽기에 무난한 얇은 책이어서일 수도 있고, 내 영혼에 필요한 책이어서일 수도 있다. 지금 읽어봐도 분량도 정말 착하다. 내용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메시지라도 희미해져 있었는지, 어느새 한 문장 문장을 달콤하게 먹고 있었다.       


천천히 책을 읽다가 이 책에 인용된 한 사례에 잠시 멈춰 섰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목수와 그의 제자가 나눈 대화라고 한다.      


어느 날, 한 목수와 그의 제자가 숲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유난히 키가 크고 굵은 데다가 옹이도 많고 아름다운 오래된 참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였다. 

“너는 이 나무가 왜 이다지도 키가 크고 굵고 옹이가 많으며 아름다운지 아느냐?”

목수가 제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제자는 스승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이 나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쓸모가 있는 나무였더라면 오래전에 베어다가 식탁이나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그럴 만한 값어치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크고 아름답게 자라서 모두가 그 그늘에 앉아 쉴 수 있게 되었느니라.”     



이 사례 옆에 이 문장들을 연이어 적고 있었다. “쓸모없음의 유익”, “고독의 시간을 계산한다.”라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바라는 바는 “쓸모 있음”이다. 자신의 ‘쓸모없음’에 마음이 닳고,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그 ‘쓸모’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를 달린다. ‘쓸모없음’을 바라는 이가 과연 있을까.     

 

이 사례를 읽으며 현실과는 괴리를 느끼기도 했지만, 머리를 한 대 얻은 맞은 듯했다. 사실 나의 현재의 ‘쓸모’는 ‘쓸모없는 시간’을 통해 탄생했다. 언젠가 SNS에 비슷한 글귀를 올린 적이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가장 무용과도 같은 시간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그 시간이 ‘쓸모’를 만들어 준다고 말이다. 나에게는 공부에 몰입해야 했던 안식월, 임신하고 육아, 퇴직 후 은둔했던 수개월의 시간이 사람들이 보기에 어쩌면 쓸모없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던 그 시간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기에 기쁨으로 온전히 누렸다. 지금도 그런 시간을 사모하며 종종 만들기도 한다. 일주일 중 모임도 강의도 약속도 없는 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로 스스로에게 선포하며 나와의 밀애를 누리며 자유를 만끽한다.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생을 살자고 독서와 글쓰기를 권하는 나이다. 그렇게 우리 생은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다며 ‘쓸모’를 종종 외친다. 그러나 그 쓸모가 빨리 이루어지기 위해서 지름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빠르게 쓸모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불안해하고 조급해하기도 한다. 그 쓸모라는 것에도 종류가 있는지, 상위 1%에 들지 않는다고 좌절하기도 한다. 저마다 생각하는 쓸모의 기준을 다르겠지만, 그러나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찍이 영재로 점찍어진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어릴 때만큼의 특별함을 보이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들을 본다. 일찍이 성공한 이들이 빠르게 퇴락의 길을 가는 것을 목도하기도 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좀 바빴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사실 싫다. 뭔가 시간 관리를 잘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삶의 균형을 잃은 듯 보이기도 해서이다. 바쁘다는 말에는 일정이 꽉 차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마음의 조급함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일정이 많아도 마음과 몸의 조화를 이룬 날에는 삶이 그리 바쁘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균형이 흐트러지는 시점에는 내가 일정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에 나를 맞춘 느낌이 되어 버린다.       




     



고독의 시간을 계산한다


위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의 고독의 시간을 다시 계산해 본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이미 고독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고독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혼자 있지만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연결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지만, 이 연결이 기준점을 넘어서면 타인과 세상이 끊임없이 나를 침범함으로 내 기준과 욕망이 뒤로 밀리게 된다. 결국 진정한 내가 되고자 하는 숭고한 욕망은 세상에 침식되어 버린다.     


헨리 나우웬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성공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성공 자체로 변하고 만다.”, “채점자들에게 영혼을 팔아버리고 만다.”, “이 세상이 만들어 낸 제품이 되고 만다.”      

어떤 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요한 새벽에, 모두가 찾는 시간을 피해 아이와 가족이 모든 잠들어버린 밤을 유영한다. 어떤 이는  쓸모없이 여겨지는 퇴직이나 은퇴 후에, 영유아를 돌봐야 하는 육아의 시간을 두려움 없이 향유한다.  


나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쓸모없음의 유익에 동의하냐고?’, ‘쓸모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쓸모없음의 시간에 지금도 동참하고 있냐고?’, ‘쓸모없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언제든 모든 ’ 쓸모‘를 포기할 수 있냐고?’      

그리고 적어본다.      



울퉁불퉁해도 괜찮아. 넌 AI가 아니잖아. 

새벽에 안 일어나도 괜찮아. 가끔은 루틴을 흩트려 봐. 

커뮤니티 안 해도 괜찮아, 혼자도 나름 좋아.  

강의 안 해도 괜찮아, 침묵도 필요해.  

SNS 안 해도 괜찮아, 너만의 시간을 보호할 필요도 있어.  

유용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너에게만 유용한 시간도 필요해. 

쓸모없어도 괜찮아.

행위나 업적이 아니라, 네 존재로 이미 쓸모가 있으니깐...     



성취, 활동, 공헌, 기여, 업적, 유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잠시 내려놓는다. 이 문장들을 적는 순간, 그것이 시각화되며 다시 내 마음에 새겨진다. 약간의 해방감이 차오른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함이 느껴진다.      


이 쓸모없음은 고독의 시간에서 주어진다. 역설적이게도 쓸모없을 것 같은 고독에서 ‘쓸모’가 서서히 생겨난다. 쓸모가 생겨난 후에도 이 쓸모없는 시간을 수시로 만들어야 한다. 고요와 함께하지 않는 삶은 쉽게 파괴되기에.      


나는 이 무용의 시간을 사랑한다. 이 시간을 통해 쉼 없이 내달리던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내 안의 거짓된 욕망은 발견하며, 성공과 실패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의 힘을 재장착하며, 주어진 모든 것이 선물임에 감사하며, 나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다시 얻는다.       




    




마음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care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상담가뿐 아니라 부모나 강사, 코치, 작가, 어떤 분야의 모든 전문인은 사람과 세상을 care 하고 있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이 단어를 너무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기에 단어의 원래 의미가 퇴색되었음을 지적한다.      


care라는 말의 어원은 고트어의 ‘kara’에서 왔는데, care의 원뜻은 비탄하며, 슬픔을 견디고 울부짖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가볍게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에 이런 강한 의미가 담겨 있었나 하는 놀라움이 솟아오른다.      

헨리 나우웬은 이어서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을 이용하여 참으로 중요한 문제에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안전하게 도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이 없는 치유는 이롭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을 잊게 된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 누구는 글이나 영상이 담긴 SNS 콘텐츠를 통해, 누구는 강의나 일대일 코칭이나 상담을 통해, 누구는 책을 통해 말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care 안에 담긴 상대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진정한 치유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정보를 많이 주지 않지만,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리 부산스럽지 않더라도 존재만으로 치유와 변화를 가져다준다.      


한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정말 초인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금세 포기했다. 그러나 그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이렇게 글을 쓰며 성찰해 가는 수련의 시간, 이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을 묵묵히 가진다면 100세 시대에 어느 날엔가는 누군가에게는 조금은 그런 존재가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조금은 가져본다.      


다 안다는 듯이 정보성 말과 글을 남발하고 있지 않은지? care의 마음이 배제된 소통을 기계처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답 없는 질문을 용기 있게 던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시대를 넘나들며 오래도록 시간을 견디는 작품을 쓴 작가들은 답을 쉽사리 내리지 않았다. 그들이 문학가이든 철학가이든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이라면 해야 할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들을 써 왔다. 그들에게는 care의 마음, 즉, 그 시대를 향한 비탄과 슬픔, 울부짖는 마음이 있었다. 나에게 진정으로 care의 마음이 있는가? 당신에게도 이 마음이 있는가?      


쓸모없음이 ‘쓸모’를 만들어 낸다. ‘쓸모’ 안에는 기술과 마음이 함께 담겨 있어야 한다. 마음이 서로를 이어주며 진정한 변화를 낳게 한다. 이 또한 너무 목표 지향적인가 싶지만, 우리 모두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이 마음은 ‘쓸모없음’의 시간에서 태어나고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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