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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Nov 08. 2021

천년을 어떻게 버텼을까



 

강원도 원주시 반계리에는 천년이 된 은행나무가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라고 불린다. 조금 늦은 11월 초가 되어야 만개한다고 한다. 너무 일찍 가면 초록빛이 감돌아 그 감동이 덜할 수 있다.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원주에 살아도 가보지를 못했다. 함께 걷는 모임에서의 이번 출발지가 '반계리 은행나무'였다. 반계 초등학교에 주차를 하고 정문으로 나가 조금만 걸으면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167호로, 높이 33m, 가슴 높이 둘레 13.1m, 가지의 퍼진 길이는 동서가 25m, 남북이 28.8m가 된다. 나무의 나이는 8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10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나무속에 흰 뱀이 살고 있어 지금까지 나무를 다치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는 전설로 인해 신성한 나무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을에 한꺼번에 단풍이 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일행들과 주차를 하고 은행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동네는 아주 오래된 시골 느낌으로 주변에 논과 밭, 집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걸어가는 길 주변에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들과 이미 초록빛을 잃어버린 손질되지 않은 갈색 톤의 나무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여름의 강한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다 수확해 버린 빈터들만이 옆에 늘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 들어갔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저 멀리서 헤아릴 수 없는 노란 잎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면서 드러나는 나무의 풍채는 장관이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도 멋들어졌지만, 실물로 보는 그 나무는 더욱 거대하고 장대했다. 가꾸어지지 않은 주변 풍경에 비해 그 나무만이 유독 강렬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나무의 높이와 넓이 그 크기도 크기였지만, 그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은 몇 개의 나무를 합친 것처럼 보였다. 한 일행은 나무가 하나인지, 몇 개가 합쳐진 것인지 물었다. 이 정도의 잎들을 지탱하려면 그것을 받치고 있는 기둥의 두께가 이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땅 속의 뿌리는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행들과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나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나무 전체를 카메라 프레임에 담기도 하고, 노란 잎들만을 담아보기도 했다. 사진을 다 찍은 후 우리 일행은 은행나무를 지나쳐 또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다. 은행나무와의 짧은 만남이 아쉬워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길을 걸으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천년이 넘었다고?’. 아는 지인은 어릴 때 이 동네가 외가라 이 나무 밑에서 뛰어놀았다고 한다. 이 나무는 언제부터 유명해졌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쉬며, 위로와 혜안을 얻고 갔을까 등의 생각들이 오갔다.


 그리고 도착한 생각의 지점은 어떻게 천년을 버텼을까? 그전 직장에 21년을 몸담았었다. 20여 년도 사실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일을 하는 중간에 몇 번이나 위기가 왔었다. 퇴직 몇 년 전 대학원을 다닐 때 한 수업 중 과제로 교수와 학생이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방문했던 곳 중 하나로 지하 동굴과 같은 방이 있었다. 이 공간은 제롬이라는 사람이 성경을 번역한 방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성경이었기에 교육받은 사제의 해석에만 의존하였다고 한다. 누구나 성경을 스스로 읽을 필요가 있었다. 제롬은 성경 번역의 사명을 맡고 베들레헴으로 간다. 그는 동굴과 같은 지하 방에서 20여 년 동안 성경 번역에만 일념 한다. 그 성경이 ‘벌게이트’라고 불리는 라틴어 역 성경이다. 벌게이트는 ‘서민’이라는 뜻이다. 제롬의 한결같은 충성으로 인해 로마의 일반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을 묵상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방을 둘러보며 다짐했었다. ‘그래 지금 힘들어도 최소 20년은 버티어 보자.’라고.







 퇴직 후 1년이 되어간다. 자유로운 삶이 마냥 행복하기도 했지만 너무 많은 기회와 배울 것이 많은 세상에서 피곤하기도 했다. 수많은 정보를 잘 분별하여 선택하지 않고서는 몸과 맘은 더 피폐해질 수 있다. 이런 삶이 좋다가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일어나기도 한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면서 다시금 겸허해진다. 천년을 버티면서 수많은 계절을 지나오면서 얼마나 많은 바람과 기온을 맞이하며 위기를 겪었을까. 얼마나 다양한 희로애락의 이야기들을 가진 사람들을 품어왔을까 하는. 그 버팀이 지금의 유명세를 낳고, 많은 이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100세 시대에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주어져있다. 기술은 우리가 더욱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줄 것이다. 한 직장에 머무는 기간이 줄어들고 있다. 20년이든 30년이든 한 직장에 머물고 퇴직했더라도 그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어떤 형태로든지 살아가고 일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무엇을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건 없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그리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진보는 늘 기술의 발전을 입고 이루어져왔다. 기술의 도움은 인간에게 더 많은 생산력을 가져다주었다. 기술은 인간이 그동안 해 왔던 일들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대신 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부정적인 면만 주목하고 두려워하기보다 긍정적인 면을 기억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그 속도는 더욱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에 덧입어 우리에게 주어진 기나긴 시간을 인간에게만 허락된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사용해야 한다. 변화는 위기이지 기회이다. 변화는 늘 있어왔다. 변화의 시기에 유연하게 잘 버텨야 한다. 천년의 은행나무처럼.




<원주신문>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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