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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마음 Jan 12. 2024

인간은 왜 걸어야 하는가

<걷기의 즐거움>





몇 년 전 코로나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재택근무를 했고, 온라인 공간에서 주로 만났다. 안 그래도 움직임이 덜한 현대인들은 이로 인해 더욱 활동성이 최소화되었다. 나 또한 자동차로 주로 이동했지만, 모든 것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졌던 시기에는, 차 또한 휴직계를 쓴 마냥 오랜 휴식을 가져야 했다.      


2~3년을 온라인에서 살았다. 온라인으로 출근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소통하며 모였고, 강의하고, 수업도 했다. 참 편했다. 화장하지 않아도 그리 티가 나지 않았고, 옷도 셔츠만 신경 쓰면 되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준비해야 했던 시간을 계산해 보니 적지 않은 양이었다. 매일 1~2시간, 타 지역일 때는 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모아진 시간만큼 더 부지런 해졌나를 생각해 봤을 때 확실히 삶에 여유가 생긴 것은 맞았다. 그러나 문제는, 안 그래도 움직임이 최소화하고 살았던 내 몸은 점점 더 근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은 집 앞 운동장, 집 앞 작은 산이라도 걸어보자는 마음에 열심히 걸었다. 그러나 뭔가 내 성에는 차지 않았다. 조금 더 생기 있는 걸음, 숨이 찰 정도의 운동량을 채우고 싶었는데, 어느 정도 숨만 쉬다가 들어오는 거 같았다.      


일할 때 몰입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열정만큼 머리와 몸이 따라가 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몸의 신호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여러 운동 모임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새로운 공간에 나를 들여놓자니 약간의 두려움도 일어났고, 마음에 훅 들어오는 모임이 없었다. 그러다가 올해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지역 걷기 프로그램 중 그 해 마지막 모임에 참여했다. 간식 타임에 내 옆에 앉은 한 여성분이 자신이 참여하는 산악회 모임을 소개해주셨다. 등산, 트레킹 모임도 검색했었는데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내가 속한 지역 산악회들은 밴드에서 주로 활동했음을 확인했다.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세 개의 산악회 밴드에 가입했다. 두 개는 일요일에 주로 모임이라 참여할 수 없었고, 토요일에 진행하는 나머지 한 개의 산악회 활동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수년 전부터 이런 모임을 가지고 있었구나.’, ‘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새벽차를 타고 매주 걷는구나.’를 보고 신기하고 놀라웠다. 새벽 3시에도 출발하고, 4시에 출발하는 코스가 있었다. 무박 코스는 그 전날 밤에 출발하기도 했다. 조금 더 일찍 합류하지 못한 것이 내 몸에 미안했다.      


《걷기의 즐거움》을 쓴 수지 크림스는 “걷기와 인간을 떼어놓는 일은 실로 대다수 사람의 삶에서 큰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걷지 않으면 삶의 큰 부분을 포기할 만큼 그렇게 중요했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까지 왜 아무도 나에게 같이 걷자고 말하지 않았지? 아니 나는 이미 많은 작가가 삶의 루틴으로 걷기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고, 온갖 매체를 통해 걸어야 산다라고 홍보하는 것도 들었었다. 그러나 내 몸이 버티고 버틸 때까지 기다렸던 것일 뿐이다.      


수렵, 채집했던 인류 역사 초기에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간은 엄청나게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명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걷을 수 있는 시간이 확 줄어들었다. 이류의 걷고자 하는 본능이 아직 내 안에도 남아 있어서인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몸부림인지 나도 이제 좀 걸어보려는 중이다. 아직은 일상의 루틴과 몸에 익지 않아 잘 지키지는 못하지만.     




혼자 걷기의 즐거움      


혼자 걸어서 여행할 때처럼 완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고, 감히 표현하자면 그렇게 완전한 삶을 영위한 적도, 그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 되어 본 적도 없었다. 장 자크 루소, <고백록>에서      


아직은 길에 대한 감각도 부족하고, 여자 혼자 걷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끔은 걷기나 등산 모임에 참여한다. 오랜 시간 모임에 참여한 분들은 걷는 중에도 수시로 대화한다. 때론 앞뒤로 수다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내 고독과 명상이 방해받는 것 같아 마음이 잠시 편치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도 지쳤는데 대화 소리가 줄어들어 갔다. 무리 속에 있지만 혼자 걷는 시간이 좋았다. 때론 풍경을 의지하기도 하고, 하나의 생각을 곱씹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무념무상 그저 걷기만 하는 그 순간.       


한 번은 19km라는 긴 산행 길에서 앞뒤 무리에서 완전히 이탈되어 철저히 혼자가 된 적도 있었다. 무리에서 떨어져 있다는 불안감은 살짝 있었지만, 중간중간 표지판이 있었기에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이 시간을 나는 무한히 만끽했었다. 물론 이내 무리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지만.      


루소는 《고백록》에서 혼자 걸을 때처럼 완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때만큼 그렇게 완전한 삶을 영위한 적도, 그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 되어 본 적도 없었다고 말이다. 루소의 말에 무척 공감한다.      


지금 시대는 초연결시대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SNS로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사람들과 연결된다. 비슷한 일상과 반복된 일은 때론 지루함과 권태를 낳기도 한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걸을 때만큼은 그 모든 것에서 잠시 해방이다. 걸으면서도 sns를 하는 많은 이들을 보지만, 나는 걷기로 작정한 시간만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 일과 휴식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듯한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나오기에 몸과 마음의 쉼을 누린다.            




조급함을 치유하는 걷기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서두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 마음도 발걸음처럼 시속 3마일(약 4.8킬로미터) 정도로 움직이게 된다. 우리 시대 삶의 문제는 생각이나 사색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_레베카 솔닛      


나의 성격 급함은 걷기에서도 나타난다. 평상시 말도 걷는 속도도 빠른 편이다. 빨리 걷기가 몸에는 더 좋다고 하지만, 몸을 위한 걷기만 있지는 않다. 이런 걷기를 할 때는 오로지 몸에만 집중해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느린 걷기도 필요하다. 내 몸을 보살필 뿐 아니라, 걸으면서 마주하는 마음과 온 풍경을 둘러볼 여유가 있는 걸음 말이다. 걷기에 일가견이 있어 이와 관련된 《걸음의 인문학》, 도보 여행의 역사를 다룬 《방랑벽》을 써낸 레베카 솔닛은 걷기와 관련해서 우리 시대의 조급증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      


그녀가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서두르지 않아서”이며, “우리 시대 삶의 문제는 생각이나 사색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나는 걸을 때조차 서두른다. 한 번은 산행할 때 오르막에서의 일이다. 나도 모르게 오르막에서도 평지에서의 걸음속도를 내고 있었나 보다. 오르막에서 중간중간 힘들어서 멈칫하는 나를 보고 뒤에서 따라오시는 분이 “오르막에서는 천천히 걸어야 해요.”하고 말하신다. 처음에는 흘려 들었지만, 한 산행에서 이 이야기를 두세 번 들었을 때에야 멈추어 나를 직면할 수 있었다.      


내 조급함에 대해서 잠시 묵상해 보았다. 좋은 점도 있다. 짧은 시간 몰입해서 많은 것을 소화하고 결과를 빠르게 낼 수 있다. 일처리에서는 좋다. 그러나 가끔 디테일을 놓치게 된다. 성격을 이유로 돌릴 수도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성과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고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정말 좋아하는 일일 경우 시간을 재지 않고, 몰입한다. 이미 3년 전 퇴직했고, 누가 나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내 일을 통제하며 살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뭔가 쫓기고 있지 않나를 내 걸음을 통해 다시 되짚어 본다.     


내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해 애써 돈과 시간을 들여 참여한 모임에서조차 나도 모르게 앞서 걷고 싶지는 않았는지, 누구보다 빨리 걸어 얼른 일처리를 마무리하듯이 효율성을 추구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불안이 내 안에 남아 있지는 않은지 천천히 되짚어 본다.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몸을 직면해서야 속도를 늦추고 질문을 던져보며, 나를 다시금 위로해 본다.      


이제 그렇게 빨리 걷지 않아도 된다고. 너만의 걸음을 걸으라고, 꼭 1등이 되지 않는다고. 뒤에서 걸으면 누가 쫓아올 염려가 없기에 더 편안하다고 말이다.     


내 몸을 한계로 몰아세우는 힘든 산행을 통해서야 내 걸음을 늦추고, 내 마음과 생각의 속도도 늦춰본다. 온 긴장이 풀어지며 호흡도 느려지고 이내 편안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해방의 걷기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 베넷은 아픈 언니를 만나러 한참을 걸어간다. 주변 사람들은 점잖은 여성인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이른 시각에 날씨도 궂은데 혼자” 그 먼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여기서 걷기는 상류사회와 숨 막히는 예법에 대한 강력한 반항이다. _ <걷기의 즐거움> 중에서      


과거에는 여성들이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니 놀랍다. 집안 정원만을 겨우 맴돌 뿐이다. 집 밖으로 나가려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니 지금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비방을 받을지라도 여성의 걷기는 당시에 여성의 주체성, 독립성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현대사에서도 걷기 시위를 했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걷기라는 행위는 그렇게 과격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다. 조용하고 느리지만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이 걷기다. 그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모든 산책은 우리 마음속의 *은자 피에르의 설교에 추동되어 이교도의 손에서 성지를 다시 탈환하기 위해 나아가는 일종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표현했는가. 어쩌면 일상적이고 지루할 수도 있는 걷기가 누군가에게는 자유와 해방을 위한 조용하지만 강력한 요청이었다. 나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었던 수많은 걸음걸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오늘도 한 걸음을 보태본다.      


*11세기 프랑스의 수도자, 민중을 선동하여 십자군 전쟁을 촉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미 물리적인 자유와 해방이 주어졌지만, 여전히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매여 있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면 의사조차도 걸으라고 했던가. 나 또한 다시 걸으려고 하자 몸의 움직임 가운데서 미세한 감정들이 전해져 온다. 특히 오르막에서는 두 발로 내 몸을 버티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었다. 그래도 내 몸 하나는 건사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여실히 무너진다. 나약함, 좌절, 후회 등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온갖 매여 있는 감정이 온갖 감정들이 쏟아진다. 동시에 내 몸의 진짜 실력을 직면한다. 머리로만 살았던, 몸으로 살아내지 못했던 나약한 민낯을 마주한다. 걷지 않을 때는 몰랐다. 두 발이 내 몸을 지탱하며 삶을 유영한다는 것은 자유와 해방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혁명이라는 것을.     


기술은 인간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기술과 산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외형적으로 더욱 편리해지지만, 안락한 삶에 도취된 인간은 눈앞에 어떤 문제가 나타났을 때 이성적 고뇌로 치열하게 싸워 극복하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도구를 사서 해결하려 한다. _쇼펜 하우어     


쇼펜 하우어는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이라는 책에서 “기술이 인간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편리함은 나약함과 나태함을 낳는다. 이는 육체와 정신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몸의 나태함은 정신의 게으름을 낳는다. 그래서 아무리 문명과 기술이 발달한 시대라 할지라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지구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항이라도 하듯이 최대한 문명을 떠나 살려는 무리도 있다. 이들은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약해지지 않겠다는 선포이다. 문명에 기술에 지지 않겠다는 저항이다. 우리의 편리함을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게는 불합리하게 대우했던 죄를 씻는 행위이다. 두 발을 현실에 붙이고 단호하게 삶을 살아내 보겠다는 의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문명을 떠나기는 힘들 것이다. 문명을 떠나지는 못하더라도, 내 몸과 너무 밀착된 자동차와 스마트폰이라는 편리한 기술을 잠시 내려놓고, 어디든 걸어 보자. 일상의 한복판에서 불편함을 잠시 연습해 보자. 몸을 움직여보며 몸 안에 갇혀 있었던 감정을 만나보자. 기술의 노예가 아닌, 내 몸의 주인 됨을 선포해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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