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이르러서 가장 처참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 된 것을 한 가지 꼽자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지만 그것을 자유자재로 표현하거나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있다. 인간은 사랑을 주고받게끔 설계되어있지만 현대 문명의 복잡성과 간교함으로 인해 이를 억압당한다.
우리는 지금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랑이 사라졌다는 것을 피부에 와닿게 체감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퐁퐁남과 설거지론의 등장이었다. 설거지론이란 젊은 시절에 많은 연애를 하던 여자가 나이가 들어 경제적으로 안정된 남자와 결혼한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결혼 생활에서의 남성은 여성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설거지를 하게 된다는 뜻이 설거지론이다.
설거지론에서 중요한 것은 여성의 문란한 성생활도 아니며, 젊은 시절의 자유로운 연애도 아니다. 바로 사랑이 없는 결혼이다. 그렇다면 퐁퐁남이라고 불리는 남성의 특징은 무엇인가? 젊은 시절 미래를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들이다. 상위 1% 에서 10%의 남성들이다. 그들은 아주 착실하게 삶을 살아왔다.
죽어라 노력한 결과는 퐁퐁남이라는 오명이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가? 왜 일절 사랑이 없는 결혼이 성립되는가? 아무리 결혼은 현실이고 계약이라고 하지만 일말의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 결혼은 정말 가능한 것인가? 단지 시장의 원리만 적용되는 것이 결혼인가? 설거지론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많은 남성들이 분노했다.
남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분노했겠지만 진짜 분노의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노력의 결과가 퐁퐁남이기 때문이었다. 퐁퐁남으로 불리오는 남자들은 모든 욕구를 참고 앞만 보고 달려왔을 것이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이상형과 결혼했지만 집안의 모든 대소사가 아내의 결정으로 넘어갔고 자신은 꼭두각시가 되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꿨지만 현실은 자신이 번 돈으로 용돈을 받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 결혼 후 경제권은 단순히 성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금융에 대해서 잘 알고 더 잘 운용하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사랑?
순진한 거 아니야?
결혼 제도의 진실
남녀의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사랑의 상실은 남녀 모두 파국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반드시 실패하는 사업이 있다면 당신은 하겠는가? 아무리 노력을 쏟아봤자 반드시 망하는 사업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결혼과 연애 사업이다.
그래서 비혼 주의가 사회적으로 부상한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한국은 출산율보다 사망률이 지수가 더 높아져 이대로라면 한국인은 사라진다. 이는 사랑의 상실이 불러온 재앙이다. 시장 논리로 인간의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의 상실은 언젠가 시한폭탄이 된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연애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커플이라도 말이다.
반드시 실패하는 사업은 바로 사랑 없는 연애이고 결혼이다. 하지만 상실된 것을 극복한다면 실패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회복이다. 여성은 남성의 경제적 조건과 다양한 조건을 따진다. 이는 아주 참된 것이다. 왜냐면 여성은 생명을 잉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여성의 까다로운 배우자 선택 조건은 납득할만하다.
상태가 이상한 남성을 선택한다면 태어난 아이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보장받지 못한다. 경제적 능력을 따진다고 해서 여성에게 속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이는 수천 년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달라진 적 없는 여성의 성 전략일 뿐이다. 그래서 남성이 여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사회적 성공과 안정적인 자산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에게 선택받는 여성은 어떤 여성인가? 바로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다. 그리고 신체적 매력이 뛰어난 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 그리고 신체적 매력이 뛰어난 여성은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확률이 높다. 남성 조상들은 외부적으로 보이는 여성의 모습으로 빠른 판단을 해야 했다. 건강함의 기준을 여성의 신체적 매력으로 꼽은 것이다. 남성 조상들은 배우자 선택 기준을 나름대로 만들어온 것이다. 즉 남성은 자신이 의도했던 안 했던 자신이 예쁘다고 판단되는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한다.
남성은 최대한 많이 성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습성이 있다. 성관계에서 여성보다 잃을 것이 적은 남성은 최대한 많은 여성에게 유전자를 남기는 전략이 유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상위 1%의 리더나 알파남에게만 허락된 성 전략이었다. 대부분의 남성은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 한 여성을 선택하는 결혼제도를 받아들였다. 한 여성에게 모든 자원을 지원해 주면서 자신의 아이를 잘 키우고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성은 안전하고 따뜻한 삶을 배우자에게 약속받는다.
결혼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만족시키는 전통적인 제도이다. 세계적으로 1부 1 처제가 자리 잡은 이유는 결혼이 매우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남기고 동시에 행복한 삶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성은 조건만 따지는 것일까? 아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사랑이 없는 결혼은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예외인 경우도 있다. 남성이 여성의 마음을 돈으로만 사려고 드는 경우도 있다. 또한 여성은 남성의 재산을 탈취 또는 그것만을 보고 결혼하고 원하는 것을 얻은 후 남성을 버리는 경우도 있다. 전 세계 그리고 우리 사회 어디에나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바라는 것은 사랑이다. 즉 안정감이다. 남자는 목숨을 내놓더라도 지키려고 드는 것이 바로 여성이 주는 사랑이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보듬어주는 것을 바란다. 남성이 결혼 생활에서 바라는 것은 안정감 있게 쉴 수 있는 따뜻한 가정이다. 여성은 단지 남성 배우자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기만 하면 된다. 정말 그거 하나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원초적으로 끌리지 않는 남성을 사랑으로 돌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척은 가능하지만 이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갈등이 불거진다.
남성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남성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긴다. 하지만 가족이 다치거나 상처 입으면 낙담하고 좌절한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함을 책망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들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가정을 위해 위험한 일을 꺼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주변에 너무나 흔해서 평범해 보일뿐이다.
사랑의 상실은 남성의 헌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일터에서 상처받고 집으로 돌아온 남성은 집에서조차 사랑받지 못하고 쉴 곳을 잃는다. 이는 사랑의 부재가 불러온 끔찍한 처벌이 아닐 수 없다. 이것 만큼 끔찍한 일이 있을까? 자신의 모든 걸 바쳐야 되는 존재들에게 존중받기는 커녕 무시받는다. 그리고 아랫사람 취급을 받는다면 처참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까지 했는데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면 또한 조건만을 보고 자신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곳을 지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일말의 사랑도 없는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싹튼다면 그 관계는 이어갈 희망이 있다. 원초적 끌림이 없는 상대와 결혼도 심지어 연애도 하지 말자. 만약 조금이라도 심장이 두근 된다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빼놓고 인생을 논할 수 없어야 한다. 사랑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고귀하며 위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