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aehyun Kim Feb 02. 2017

설날의 추억

나도 고속도로에 갇히고 싶어요

"빨리빨리 서둘러라"


  명절 아침이면 새벽같이 일어나신 아버지의 호통에 눈을 비비며 겨우 잠에서 깬다.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시는 아버지가 명절에는 더 일찍 일어나신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눈곱도 못 땐 채 할머니 집으로 향한다. 차에서라도 잠깐 눈을 붙이면 좋으련만 할머니 댁은 차로 5분이 채 안 되는 거리다.


  일본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해방이 되면서 돌아와지었다는 집은 인가가 드문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완전한 한옥도 양옥도 아닌 엉거주춤한 기와집으로 주변이 대나무 밭으로 둘러싸인 꽤 큰 집이다. 마당에 웅크려 있던 백구가 짖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의 시골집은 춥다.


"추운데 벌써 왔나?"


   창호지를 꼼꼼히 바른 나무 미닫이를 열고 할머니가 나오신다. 시골 추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셨을 만도 하련만 누빔 옷을 몇 겹이나 입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계신다.  


  아버지를 도와 빗자루로 새하얗게 내린 서리를 걷어낸다. 싸리비가 내는 사각사각 소리가 겨울이 내는 비명소리 같다. 쓸데없이 넓은 시골 마당이 괜스레 미워진다. 아무리 쓸어내도 겨울은 그대로다. 걸레를 빨아 마루를 닦고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한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시골집은 아무리 닦아내도 여전히 어딘가 어수룩하고 낡아 있다.


  어머니는 이미 뒤편 부엌으로 사라지신 지 오래다. 찾아가 보거나 도와주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저 기름 냄새와 밥 냄새가 온 집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어머니가 차례상을 차리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한켠에 언제 누가 켰는지 모르는 TV에는 명절 도로교통 상황이 연방 나온다. 고속도로에 차가 많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평소보다 몇 배나 더 걸린단다.


  까치소리가 들리고 해가 불그스름하게 올라올 때쯤이면 이윽고 친척들이 몰려든다. 그래 봐야 지척 거리에 살고 있어 자주 보는 사촌들과 삼촌, 숙모 들이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몇 시간을 허비했다는 둥, 새벽 몇 시에 출발했다는 둥, 새로 뚫린 길이 어떻다는 둥 하는 이야기는 없다. 자주 보아 데면데면해서 인지 혹은 이른 아침이라 잠이 덜 깬 건지 다들 말수가 없다. 명절이라고 특별히 윷놀이, 제기차기, 연날리기 같은 놀이도 없다.


  배알이 꼴린다. 전 국민이 동참하는 큰 행사에 나만 초대받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도 서울 어딘가로 이사 갔으면 좋겠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고속도로에서 몇 시간을 있어보고 싶다. 일 년에 겨우 몇 번 볼까 말까 했다면 친척들도 나를 좀 더 반갑게 맞아줬을 것이다. 오랜만에 윷놀이도 하고 미뤄뒀던 이야기도 오손도손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몰려든 사람들 탓에 아침부터 정리해놓은 집은 금방 어질러졌다. 짜증이 난다. 책에서 봤던 설날과 나의 설날은 너무나 다르다. 숨죽여 씩씩거리며 뒷간으로 나가 버린다. 


"어데갔노? 차례 지내게 온나"


  차례를 지낸다. 대단한 종갓집이나 뼈대 있는 집안이 아니지만 정성껏 차리고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아버지 덕에 엄격하고 엄숙하게 진행된다. 제사까지 하면 일 년에 너 다섯 번은 하는 행사지만 어색하고 생경하다. 주변을 흘긋 거리며 엉거주춤 따라 한다. 


  차례상을 물리고 세배를 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다. 어느덧 빗자루로 쓸어내려해도 없어지지 않던 추위가 사라졌다. 아침일찍부터 움직였더니 밥맛이 꿀맛이다. 만날 봐와서 할 이야기도 없을 것 같았던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주머니 속에 두둑한 세뱃돈 덕에 마음도 푸근하다.


  나이가 들어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어릴 적 꿈꾸던 설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에게도 귀향이 생겼다.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보게 되는 친척들이라 예전보다는 더 살갑게 맞아준다. 이제 아침 일찍 시골집에 가서 빗자루 질을 할 필요도 없다. 때맞춰 도착하면 이미 친적들끼리 모여서 만들어 둔 음식을 먹고 차려진 차례상에 절만 하면 된다. 그런데 뭔가 더 허전하다.


  설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문득 예전의 설날이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적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