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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율 Mar 19. 2022

나무에게 배운 뒤돌아보지 않는 삶

<신갈나무 투쟁기>를 읽으며 배운 어리석은 현명함

그동안 지나치게 많은 일이 있었다.

지근거리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유령같은 바이러스가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사람들의 말하는 입을 볼 수 없었다. 대선이 있었다. 수 십 년, 수 백 년간 자라온 산들의 나무는 매서운 바람과 함께 지난 몇 주간 내내 불탔다. 그리고.... 처음엔 형체가 전혀 없어 보였던 혐오의 말들이 힘을 얻고 모양을 갖추어 기어이 움직여 앞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해버렸다. (와…이게……된다고?…) 세상 모든 것들이 내게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크고 강력해,

넌 아무것도 아니야.


한 개인이, 무엇보다 나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존재감 없는 사람인지 절절하게 깨달으면서, 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또다시 가만히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만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깊은 무기력을 껴안고 널브러졌다.


와중에 자연은 무정할 만큼 성실해서 인간의 심상과는 무관하게 기어이 봄을 데려왔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미세먼지를 뚫고 기어이 순을 틔우고 나오는 새싹 같은 것들.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기어이 정확한 것, 그것은 식물이었다.


그래, 식물이 있었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식물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신갈나무 이야기는 1999년에 출간된 다소 오래된 책이다.(개정판 2009년) 신갈나무는 흔히 우리가 참나무라고 알고 있는 나무로, 소나무와 함께 한반도에서 생태학적 위치를 경쟁하며 가장 번성한 종으로 알려져있다. 소나무만큼 사랑받지도 그만큼 고결하게 여겨지지도 않지만, 기어이 가장 많이 살아남아 오늘날의 한반도를 지배한 나무. 이 책은 그 신갈나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나무의 입장에서 따라간 독특한 책이다


우리는 흔히 자연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숲에서 서정과 평화를 얻는다. 하지만 나무의 마음으로 바라본 신갈나무의 생은 서정적이고 평화롭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치열하다 못해 때로 우악스러운 것이었다. 숲에는 늘 한정된 공간을 놓고 벌이는 식물들의 경쟁이 있었고, 모든 계절에는 그 계절의 시련이 있었으며, 무자비한 다른 생물들의 공격도 있었다. 하지만 나무는 극복해야 한다. 나무에게는 애초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p.66

신갈나무는 언젠가 숲의 주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나무이다. 아니, 숲의 주인으로 운명 지어진 족속이다. 잔가지를 내고 가지마다 잎을 내고 꽃을 내고 그저 낮은 데서 적은 빛으로 살아가는 무리가 아니라, 숲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많은 나무를 아래로 거느리고 승리의 왕관을 쓰고 싶은 족속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나무는 이 과정을 극복해야 한다. 나무는 올해만 사는 것이 아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회를 노려야 한다. 길고 짧은 것은 두고 볼 일이다. 그때를 잡을 거다. 곁가지 무성한 네놈도 두고 보자. 나는 언제까지 참을 수 있다. 어린나무의 오기는 오랜 가문의 전통이 걸어 놓은 거부할 수 없는 주술이다.


인간의 문학적 서술이라 더욱더 그렇게 보이는 것일 테지만 신갈나무는 정말로..... 우악스러워 보였다. 지나치게 살아남는데 진심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나는 억척스러운 것과 매사 꺾이지 않는 태도를 쉽게 비웃는다. 뭔가 지나치게 매번 최선을 다하는 삶은 비경제적이고, 무엇보다 쿨해 보이지 않고, 심지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들은 이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세계에서,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여름에 폭풍이 오면 이 중 어떤 것들은 형체도 없이 부서질 텐데, 그중 얼마는 말라죽을 텐데, 겨울이 오면 어떤 것은 고사할 텐데, 이 모든 일을 견디고 살아남으면 사람들이 베어 갈 텐데....


내가 보기에 모든 계절은 치명적인 시험을 숨겨둔 시련의 장처럼 느껴졌다.  인간인 내가 모든 삶의 변화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에게 계절은 그저 삶의 조건일 뿐이다.


P.74

빛은 계절을 이끄는 잣대이다. 빛의 양은 조건일 뿐이다. 시련이 아니고. 계절은 조건일 뿐.


신갈나무는 빛의 양을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늘 존재하는 조건으로 여기고, 그에 맞는 삶의 방식을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으로 보였다. 때로는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때로는 버리면서. 나무에게는 과거나,미련, 후회를 뜻하는 언어가 없었다. 


p.129  ~ 132

봄과 여름이 생산의 시간이었다면 가을과 겨울은 지킴의 시간이다. 따라서 겨울의 모진 북풍한설도 짧은 햇빛도 모두가 견디어 내야 할 과제이다. 몸 전체를 완전히 봉쇄하고,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없이 숨죽인 채 지내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나무는 일체의 몸을 정리하고 속을 정리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보강할 것은 보강하는 일, 나무에게 미련과 집착은 절대 금물이다. (중략) 신갈나무는 더 이상 잎에 투자하지 않는다. 물론 공로는 인정하지만 전체를 위해서 우선 정리해야 할 것이 잎이다. 나무는 예우 차원에서 벌어지는 구차한 미련의 결과들이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또한 복잡한 부패의 고리를 만들어 내는지 잘 알고 있다.


나무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생명체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는 것, 아니 뒤돌아 볼 수 없는 것만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조건이 좋을 때만 오늘을 열심히 살아낼 용기를 가지는 것,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때만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 그런 쉬운 삶은 애초에 살아있는 것들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적은 영광과 많은 과오가 있다. 자랑스러운 기억도, 치명적인 잘못도 있어서 그런 기억들에 오래오래 머물면서 웃었다가 슬펐다가, 부끄러웠다가 기뻤다가 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말을 좌우명 같은 것으로 삼았었는데, 매번 실패해 왔다. 그 이유는 나무의 일생을 다시 읽으며 알게 되었다.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지독히도 한 방향으로 한정한 채 생각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 어떤 태도를 말하는 것이길래.


내가 본래 아는 뜻은 과거의 실수, 잘못된 선택, 과오, 어쩔 수 없이 받은 상처에서 영향받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인간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어서, 나는 인생 전체에 걸쳐 언제나 실패해왔다. 그런데 자연은 이 뜻에서 한 발 더 앞서간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영광,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얻어낸 삶의 성과까지도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것.


 그렇지 못한 사람을 아주 많이 봤다. (무엇보다 나...) 그 적은 과거의 영광에 평생을 붙잡혀 있는 사람들, 단 한번의 정점을 본래 자신의 위치라고 생각하는 경우. 우리의 발목을 잡고, 고개를 앞으로 돌리지 못하게 하는건 의외로 후자, 지난날의 과오가 아닌 성취이다.

‘내가 이렇게 고등교육을 받았는데, 이런 일을 한다고?’, ‘내가 이것을 전공했는데? 이런 것을 다시 공부하겠다고?’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이 정도 대접밖에 못 받는다고?’,  ‘내가 이 사람에게 준 사랑이 이만큼인데 되돌려 받지 못한다고?’  이런 생각들, 이런 인간의 생각들.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앞으로의 삶을 살겠다는 말이다. 과거의 성취와 과오 모두로부터 독립된 채 오늘의 조건을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영원한 현재를 살겠다는 선언이다.


자연은 뒤돌아보지 않는 것의 귀재이다. 그래서 나무는 버리는 것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여름 내내 햇빛을 받으며, 잎의 엽록소를 통해 수분과 에너지를 가장 많이 투자하는 광합성을 한다. 그것으로부터 성장한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잎을 가을이 되면 가장 먼저 포기한다. 그 잎들은 일조량이 부족한 겨울을 살아내는데 생물학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겨울은 견뎌내야하는 시기이다. 충분한 광합성을 해내기에는 부적절한 환경에서 수분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잎을 붙들고 있을 이유를 나무는 발견하지 못한다. 잎을 떨어뜨리기로 결심한다. 많은 것들을 투자했고, 그래서 힘들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만들어낸 잎은 찬란하고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맨 몸으로 겨울을 나기로 하는 것이다. 기온과 일조량이 낮아지면 잎은 자루를 만들어서 잎으로 가는 영양분과 수분을 차단한다. 그런 조건에서는 안토시아닌과 카로티노이드 같은 아름다운 색소가 나타나는데, 우리는 그걸 단풍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양과 수분이 차단된 채로 단풍이 든 잎은 곧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는데, 그것은 낙엽이라 부른다.


P.135 ~ 136

일반적으로 안토시아닌 기능은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 종자의 번식과 가루받이를 용이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물로서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물질이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기온이 서서히 낮아지면 엽록소는 파괴되기 시작하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카로티노이드는 그대로 잎 속에 남게 되고, 또한 안토시아닌이 합성되어 나뭇잎은 아름다운 단풍 색으로 변한다. (중략) 단풍의 색은 나무가 우리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에게 이유 없는 존재란 없다. 카로티노이드나 안토시아닌 모두가 값비싼 화합물이다. 이들은 나름대로 나무에게서 부여받은 역할과 기능이 있는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며 나무가 엽록소를 포기하면 그게 단풍이고, 살려고 잎을 버리면 그게 낙엽인 것인데, 이 절박한 생의 선택과 투쟁이 왜 우리 눈엔 아름답게 보이는지는 모를 일이다. ‘비싼 화합물로 만든 사치스러운 풍경이기 때문일까? 인간이 감탄을 하건, 감상에 빠지건 말건 나무에겐 삶의 분투일 뿐, 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나무는 뒤돌아 보지 않으니까. 그것들은 이제 없지만, 언젠가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믿으니까.


P.120

그렇게 계절이 반복적으로 오가면서 나무는 성장해 간다. 성장하는 만큼 삶도 연륜을 쌓아 간다. 그러나 왠지 나무의 성장은 그리 눈부신 것이 아닌 것 같다. 신갈나무는 천천히 자라는 성질을 타고났다. 그래서 신갈나무에게 세월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의 삶을 보면 비관을 말하기 부끄러워진다. 그건 너무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앞으로 살아가는 쪽을 선택할 뿐이다. 그건 너무 힘이 많이들고, 내내 쌓아온 성과를 포기해야하고, 그래서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하고, 그러기에 지나치게 더딘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고 긴 시간을 믿으며, 오늘도 미래의 씨앗을 뿌리고, 홀로 서있다. 대부분의 씨앗이 누군가의 먹이가 될지라도. 알맞은 환경을 만나지 못해 대부분 나무가 되지 못할지라도.




지난 몇 주간 지나치게 많은 세계의 비관적인 전망 속에서 나는 무력함을 목까지 담그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고, 만난 적 없는 돌고래를 위해서 기부금을 내고, 무거운 가방에 기어이 텀블러를 집어넣는 일, 매일 아주 조금씩 배워서 몰랐던 혐오를 인지하는 일, 그런 일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거냐고.


권력자가 쉽게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고, 거대한 미디어에서 혐오의 말들이 폭포수 처럼 쏟아지고, 이국의 독재자가 원전을 폭격하고, 다음날의 내가 배달음식을 무더기로 시켜먹고, 바이러스의 변이가 끊이질 않고, 매년 봄마다 산불이 휩쓰는 이 세계 속에서.

여러 인간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계속해서 모든 것을 망쳐 놓는데.


그러나 이 오래된 과학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정성껏 조금씩 오래 쌓고 가꾼 것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될 수도 있지만, 불에 타버리고 폭풍우가 다 쓸어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사는 방법이 없다고, 다르게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눈을 감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상상해보려고 했다. 그런 풍경 안에서 속절없이 씩씩해지고 겸손해졌다. 자연계의 일부로 태어나서 오늘의 절망에도 기어이 내일을 약속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세계가 너무 비정한데 또 사무치게 아름다워서 팔다리가 저려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결핍과 허물이 많은 생명체로 태어나서,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도 기어이 봄이 왔기에 싹을 틔우고 마는 ‘어리석은 현명함’을 조금이라도 배우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어리석게도, 나도 이 비관적인 전망 안에서 다시금 보다 나은 삶을 가꾸어보겠다고 다짐하는 수밖에.




과학책은 분야의 특성상 오래되면 그 가치가 바래기도 한다. 오래된 정설은 다른 학설로 대체되며, 스스로 쌓아 올린 학문의 탑을 다시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 과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과학책을 읽는 것은, 과학의 눈으로 본 자연계의 현상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다. 특히 그것이 나무에 관한 것이라면 틀림이 없다.


<참고 : 신갈나무 투쟁기, 차윤정, 전승훈 지음/ 지성사 , 인용 내용은 페이지 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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