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갈나무 투쟁기>를 읽으며 배운 어리석은 현명함
신갈나무는 언젠가 숲의 주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나무이다. 아니, 숲의 주인으로 운명 지어진 족속이다. 잔가지를 내고 가지마다 잎을 내고 꽃을 내고 그저 낮은 데서 적은 빛으로 살아가는 무리가 아니라, 숲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많은 나무를 아래로 거느리고 승리의 왕관을 쓰고 싶은 족속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나무는 이 과정을 극복해야 한다. 나무는 올해만 사는 것이 아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회를 노려야 한다. 길고 짧은 것은 두고 볼 일이다. 그때를 잡을 거다. 곁가지 무성한 네놈도 두고 보자. 나는 언제까지 참을 수 있다. 어린나무의 오기는 오랜 가문의 전통이 걸어 놓은 거부할 수 없는 주술이다.
빛은 계절을 이끄는 잣대이다. 빛의 양은 조건일 뿐이다. 시련이 아니고. 계절은 조건일 뿐.
봄과 여름이 생산의 시간이었다면 가을과 겨울은 지킴의 시간이다. 따라서 겨울의 모진 북풍한설도 짧은 햇빛도 모두가 견디어 내야 할 과제이다. 몸 전체를 완전히 봉쇄하고,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없이 숨죽인 채 지내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나무는 일체의 몸을 정리하고 속을 정리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보강할 것은 보강하는 일, 나무에게 미련과 집착은 절대 금물이다. (중략) 신갈나무는 더 이상 잎에 투자하지 않는다. 물론 공로는 인정하지만 전체를 위해서 우선 정리해야 할 것이 잎이다. 나무는 예우 차원에서 벌어지는 구차한 미련의 결과들이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또한 복잡한 부패의 고리를 만들어 내는지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안토시아닌 기능은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 종자의 번식과 가루받이를 용이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물로서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물질이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기온이 서서히 낮아지면 엽록소는 파괴되기 시작하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카로티노이드는 그대로 잎 속에 남게 되고, 또한 안토시아닌이 합성되어 나뭇잎은 아름다운 단풍 색으로 변한다. (중략) 단풍의 색은 나무가 우리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에게 이유 없는 존재란 없다. 카로티노이드나 안토시아닌 모두가 값비싼 화합물이다. 이들은 나름대로 나무에게서 부여받은 역할과 기능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계절이 반복적으로 오가면서 나무는 성장해 간다. 성장하는 만큼 삶도 연륜을 쌓아 간다. 그러나 왠지 나무의 성장은 그리 눈부신 것이 아닌 것 같다. 신갈나무는 천천히 자라는 성질을 타고났다. 그래서 신갈나무에게 세월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