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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율 Mar 14. 2022

다시 만난 세계

카를로 로벨리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가 던진 질문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가사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좋아한다. 그 노래가 내게는 시간에 대한 거대하고도 SF적인 상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노래에는 화자와 청자가 존재한다. 화자는 모든 고통스러운 성장과 헤맴의 시간이 끝난 후의 존재이며 (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과거의 존재에게 어떤 말을 전해주고 싶어 한다.(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그 목소리를 듣는 다른 존재는 아직 미래를 모르고, 어려운 시간을 겪고 있거나 겪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알 수 없는 미래와 벽) 화자는 과거의 청자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응원하고 있으며, 동시에 청자로부터 영향받고 힘을 얻는다.(사랑해 널 이 느낌 그대로, 널 생각하면 난 강해져. ) 나는 이 가사와 청자와 화자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과거와 미래/현재의 상호작용이라고 여겼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과 갈채,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들으면 벅차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의 ‘나’ 또한 과거의 ‘나’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의 힘으로 계속 삶을 이어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 3부작을 읽는 일은 시간에 대한 은유와 암시를 이곳저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 만난 세계를 ‘오해’ 하며 듣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곳은 대중가요일 수도, 애니메이션일 수도, 문학작품일 수도, 심지어 내 삶 자체가 되기도 한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들이 공통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주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인식하는 과거, 현재, 미래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시계 초침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우리가 현재라고 발음하는 순간 현재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과거가 되어버리며, 미래는 벌써 도착해있다. 직관적으로 시간은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모두에게 동일한 우주의 룰처럼 보인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을 여러 구획으로 쪼개서 그에 맞는 태스크를 부여하는 것을 즐긴다. 동일한 시간 속에서 동일한 태스크를 해치워나간다는 개념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쉽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해하기 쉬운 것들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한 세기도 더 전에,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던 해 밝혀졌다. (143)

현대 과학에서는 이미 시간이라는 것이 보정을 필요로하는 약속 값임을 받아들였다. 매일 같이 사용하는 위치추적 시스템에는 이와 같은 인간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P. 140 - 142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인해 알려진 개념이다. 오늘날의 GPS 시스템이 상대성이론에 다른 보정을 필요로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gps위성에서의 시간과 지구 상의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지 않기 대문이다. 시차를 무시하고 거리 계산을 보정하지 않으면, GPS를 통해 얻은 결과는 지구 상에서 쓸 수 없는 틀린 것이 될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시간에 대해 생각할 때 우주의 일생에 맞춘 우주 시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주 속의 모든 물체는 각각의 고유한 시간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간에는 지역적인 조건이 있다고 봐야 한다. 마치 일기예보 같은 상황이다. 각 지역다 다르게 나타나는 날씨처럼 시간도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시간(temp)’이라는 단어에는 ‘날씨’라는 뜻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것,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지금 이 위치에서 우주로 확장해보면, 우리가 시간에 붙인 이름들(가령, 나이, 과거, 미래, 현재 같은 것들) 은 애초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모두 상상의 산물, 거대한 약속일일 뿐인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 책을 통해서 시간이 아예 없는 세계를 상정해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배운 기초 물리학의 공식들에서 시간 변수를 빼고 생각해보는 연습을 해보라고.


p.153

이것은 매우 급진적인 사고방식의 혁명이지만, 나는 우리가 방정식 안에 시간 변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르게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며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시간은 정말로 과거에서 미래로, 오늘에서 내일로 흐르는 것일까? 시간은 선형적일까?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과거와 현재만이 가능하고, 미래의 우리는 과거/현재의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까?



이런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여러 가지 생각의 가지를 뻗게 되었다.


우선, 인간이 이름 붙인 적절한 ‘때’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시간에 붙인 여러 이름들과 과잉된 의미들이 있다. 청소년기, 청년기, 중장년기 같은 것들. 우리는 그때에 맞는 어떤 과업과 의무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우주에는 ‘적기’라는 것이 없다. 우리는 대체 인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인간을 위해 마련된 시간의 순서 같은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애주기에 맞는 퀘스트가 있다고 여기는 것, 얼마나 작고 우스운 일인가요?


우리는 노년에도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으며, 20, 30대에도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과학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애초에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인식하면 조금 더 가볍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시간에 따른 과업과 의무가 없다면, 이로부터 얻은 자유로 우리는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나에게 던진 두 번째 질문인데, 아니요 라는 답을 얻었으며, 이 해답 또한 카를로 로벨리로부터 얻었다. 시간에 방향이 없는 세계를 가까스로 상상해냈기 때문이다.


p.169~170

열역학계에서의 반응은 확률적이며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상승한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반대로 열역학계가 아닌 경우(예을 들어 공간 속에서 단 하나의 원자 또는 입자만이 이동하는 경우)라면 엔트로피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므로 시간이라는 전형적인 현상들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가역적이고, 시간이 특별한 변수로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중략) 결국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관찰되는 방향을 시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물체가 낙하하기 때문에 알라는 개념이 생겨나듯,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열역학계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난 곳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자.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과거/현재가 미래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미래가 우리의 과거/현재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보통 우리는 과거를 잘 살아야 좋은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오늘의 일이 미래의 일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유는 생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유에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으며, 시간의 선형성에 대한 믿음은 힘든 현재를 살아내는 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미래를 나’를 상상하며 현재/과거를 사는 일은 여러 에너지로 쓰일 수 있기에.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쾌적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저축을 하고, 땀 흘리며 일하고 공부하며, 오늘날의 유혹과 편안함을 일정 부분 포기하며 인내한다.


그런데 만약에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과거와 미래가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면? (이러한 상상은 이미 수많은 영화에서 본 적 이 있을 것이다. 인터스텔라, 테넷…. 등이 있다.)


한 때 젊은 시절,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모든 고통과 역경을 겪고 마침내 모든 것을 다 이뤘다 싶을 때,  인생을 함부로 살기 시작하는 경우를 아주 많이 본다. 그리하여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훼손하기도 한다. (당장 몇 명 생각날 것이다.)

아주 흔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 과거의 자신을 모욕한다. 아름답고 고결하게 살았던 것, 추하고 얼룩지게 행동한 것, 모두 한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었으나,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과 도덕성을 구획화하고 정량화하여 삶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인생은 벌점제가 아니다. 어떤 훼손은 감점이 아니고, 깨짐이다. 영영 돌이킬 수 없다.


사람들은 왜 그런 실수를 할까? 우리가 시간의 선형성만 생각하며 살기 때문이다. 현재 위치한 지역과 열역학계에서의 법칙만을 사유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과거만이 미래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고, 과거의 일은 이미 완료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러기에 이미 얻은 것은 온전히 내 것이라는 열역학적 사고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인간은 과거의 자기자신에게 기어이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의 과오는 과거의 한 시절을 왜곡하거나 더럽힐 수 있다. 아름다운 시절과 무구한 과거의 일들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와, 오늘의 나도 함께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모두에게 한 시절, 어리고 무구하던 시절, 현재의 내가 되려고, 미래에 도달하려고 최선을 다해 분투하던 때가 있을 것이다.


손을 후후 불며 얼음의 길을 걷던 날들. 나은것으로,  선한것으로 나아가려했던 날들. 미래의 내가 오늘을 잘못 산다면 그랬던 과거를 분명 모욕하는 일이  테지.


오늘을  살아야 과거가 상하지 않는다. 과거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이건 나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공간과 시간의 확장 속에서 우리는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에도 무한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각각의 인간은 보이지 않는 복잡한 시공간의 네트워크 속에서 허브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많은 책임을 지닌다.

미래의 방향으로, 과거의 방향으로, 살아보지 못한 공간으로, 만난 적 없는 세대에게로.

과거와 미래는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연속하여 존재할 것이 분명한 자신에 대한 믿음이고, 지극한 사랑이라 생각하며.



현재가 지나치게 캄캄하게 느껴지면 미래의 존재를 '기억'해내 보려고 한다. 만난 적 없는, 아직 되어보지 못한 존재가 보내는 조용한 사랑과 용기를 들어보려고 노력하면서. 그러니 어떻게든 미래의 나를, 미래의 남을 만나러 가야 겠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혼란과 방황이 모두 끝나고, 과거의 자신, 혹은 자식, 혹은 새로운 세대를 고요한 마음으로 응시하고 있는 미래의 사람.


또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인간으로서 영문도 모르고 내게 주어져 버린 현재의 삶을 소중히 대하겠다고 다짐한다.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시간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부재를 상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더 많은 상상을 하고, 보다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세계를 각자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일, 그것이 카를로 로벨리라는 물리학자가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비물리학적인 가르침이기도 하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주의 일부인 우리는 우리가 위치한 우주의 한 장소에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이 가진 특유의 장엄함과 하이라이트는 뒷부분에 있다. 약간은 지루할 수 있는 발견의 배경과 기초지식을 앞부분에 제공하며,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결론이 다다랐을 때 모든 과학이 그러듯 비밀스럽게 가려져있던 아름다움을 아주 조금만 누설한다. 그것을 단서로 삼아 각자의

세계를 다시 만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참고 :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카를로 로벨리, 샘앤파커스, 인용 내용은  페이지로 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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