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FLEX
아이가 태어난 후 우리 부부는 동네 여러 소아과에 가보다가 결국 한 군데에 정착했다. 집에서 아주 가깝지도 않고 최신 시설도 중무장된 곳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사람이 늘 북적였다. 환절기라도 될라치면 감기 환자로 병원이 미어터져 복도에서 기다려야 하는 일도 많을 정도였다.
그곳에는 꺼벙하고 희끗한 머리의 원장 선생님, 나이로 따지면 우리 아이보다 훨씬 큰 손자가 있을 나이인 여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간호사들도 꽤나 오래 근무를 한 눈치였다. 척하면 척. 병원이 탁탁 돌아갔다. 병원 한 켠에 걸려있는 의사면허증이 사뭇 낡았다. 그럼에도 은퇴하지 않고 현역에서 소아과 선생님으로 활동을 하셨다. 아이를 진료하고 난 다음이면 꼭 추파춥스 하나씩을 쥐어 주시곤 했는데 아이는 진료받을 땐 무서워 울다가도 사탕을 준다고 하면 눈물을 꾹 삼키곤 했다.
제일 놀랐던 것은 가벼운(?) 진료는 돈을 받지 않고 해 주신다는 점이었다. 아이가 약간 이상하다 싶어서 병원에 가는 날도 많았는데 그럴 때는 별다른 처방 없이 진료실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 간호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신다.
다른 동네 소아과를 다니면서 알게 됐다. 그냥 진료만 보는 것도 당연히 병원비를 청구해야 한다는 걸. 어떻게 보면 의사 선생님이 자비로 진료를 봐주신 거나 다름없었다. 어느 날 진료를 받고 집에 돌아가는 길, 우연히 병원 건물 벽에 새겨진 '건물 약력'을 보게 됐다. 어머낫! 거기 소유주 란에 원장 선생님의 이름이 떡 하니 적혀있었다.
"임대료를 내지 않으셔서 무료 진료비가 가능했구나!"
실마리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조금 여유가 있으시니 그렇게 병원을 운영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자기 건물에서 병원을 운영한다고 해서 모두가 진료비를 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그런 모습이 아닐까. 약간은 존경심도 들었다.
시간이 흘러 이사 가기 전 마지막 진료 날, 나는 츄파춥스 한 캔을 들고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동안 아이를 잘 보살펴주시고 진료해주셔서 고맙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카운터에 추파춥스 한 캔을 두고 나왔다. 이사를 와서 병원을 찾다 보니 그만한 소아과가 없나 싶다. 할머니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의사, 동네 이모처럼 아이들을 어르는 간호사들이 있던 그 낡은 병원의 풍경이 갑자기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