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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이담 Sep 07. 2021

행복 훈련

바람 한 줄기를 붙잡고

그림: 서이담
오늘은 남편과 내가 동시에 재택을 하는 날이었다. 


이런 날이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의 회사에 대한 뒷담화 정도로 짐작만 해 왔던 서로의 업무 스트레스를 눈으로 보고 느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업무가 좀 더 과중한 남편에게 서재 방을 내어주고, 나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 식탁에서 일을 했다. 


어제는 점심은 맛있게 만들어 예쁘게 차려 먹어야지 생각을 하고 잠에 들었지만 결국 시간과 귀찮음에 쫓겨 배달음식을 시켰다. 별점을 잘 살펴가며 식당을 골랐지만 리뷰를 꼼꼼히 보지 않아서일까 쌀국수는 맛이 괜찮았는데 볶음밥이 별로였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쌀국수를 사이 좋게 나눠 먹은 후 그래도 재택을 누려보자 싶어 같이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있잖아. 나 요즘 너무 자괴감이 들어. 내가 이 일을 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도 들고."


"어 그거 요즘 나도 느끼고 있는건데, 그래도 손도 못대거나 그런 건 아니지?"


업무시간과 바로 이어진 산책 시간이어서일까 우리의 이야기들은 조금 우중충했다. 회사 이야기는 약간 회색 빛이 돈다. 몸까지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훅 - 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산책길 옆에 산이 있어서 산속 시원한 공기가 내려오곤 하는데 오늘은 비도 와서 수분이 가득찬 공기가 더욱 청량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입 속에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바람 너무 좋다. 그치?"


순식간에 머릿속이 청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고민과 무기력감같은 것들이 마법을 부린 듯 사라졌다. 뒤이어 이런 생각을 의식적으로 채워보았다.


지금 일 하고 있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걷고 있다.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다.

기분이 좋다.

행복하다.


내게 주어진 산뜻한 바람과 청량한 공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있음에 감사했다.




오늘 산책을 하면서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을 내가 종종 아니 대부분 놓쳐버린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런 것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알면서도 미련하게 지금, 행복을 놓쳐왔다. 


행복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님을, 지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려고 애써 주의를 환기시키는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것임을 알았다. 바람 한 줄기에도 나는 행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잠재력은 충분하니 훈련을 좀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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