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과의 거리 두기

길고 꾸준하게 벌어야 하는 당신에게

by 서이담

“와 씨, 큰일 났다. 불이래!”


협력사의 부품 공장에서 불이 크게 났다. 불이 나 공장 안의 여유 자재가 모두 타버린 것은 물론이고 협력사 안에 있던 우리 회사 소유의 물건들도 피해를 입었다. 우리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주요 부품을 만들던 곳이었기에 생산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회사 안팎으로 난리가 났다. 생산 부서, 영업 부서와 구매 부서를 포함해 여러 관련 부서가 함께 긴급 대책회의를 했고 현장 점검을 위해 우리 회사 직원들이 직접 파견되어 밤을 지새우는 등 회사는 일사불란하게 위기 상황을 대처해나갔다.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나도 당황했다. 당시 한 선배와 함께 꽤 규모가 큰 해외 고객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사장 성격이 지랄 맞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화재로 그 고객사에 나갈 제품이 제 때 생산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사장에게 어떻게 이메일을 써야 하나 그게 제일 걱정됐다.


같이 일하던 선배는 경험이 많으신 분답게 당황하지 않고 일을 척척 처리했다. 먼저 큰 화재였던 터라 여러 인터넷 신문에 화재에 대한 기사가 나서 그 기사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고는 이를 첨부해 고객사에 메일을 보냈다. 사장과 화상 통화를 해서 앞으로 판매에는 문제가 없을지, 현지에 여유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를 알아보는 등 그 선배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해 나갔다. 더 중요한 건 상대방에게 자신이 최선을 다해 상황을 수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사실 회사에선 이게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그렇게 고객에게서 시간을 번 뒤 사내에서 벌어지는 회의에 참석해서 고객의 입장을 전하고 유관부서와 상황을 더 조율해 나갔다.




“이거 웃기죠? 한 번 봐요.”


그런 긴급한 시간들을 보내던 중 선배가 업무와 전혀 관계없는 웃긴 이야기를 메신저로 내게 건넸다. 처음엔 당황했다.


‘누가 봐도 긴급한 상황인데 저런 여유는 어떻게 나오는 거지?’


이런 마음이 절로 들었다. 사고 대응하느라 한 시가 바쁠 때인데 농담이라니.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그 자세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나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까지 데려와서 두고두고 곱씹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니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집에 가면 밥도 차려야 하고, 설거지를 하라고 남편 독촉도 해야 한다. 그리고 잔소리를 했다고 토라진 남편을 끌고 산책을 나가서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먹여야 가정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아이를 낳으니 집이 아예 두 번째 일터가 되어버렸다. 우선 집에 돌아오면 7시, 아이를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혀야 한다. 맵지 않은 밥과 국으로 아이 먹을 것을 차려 주고 내 밥을 먹으며 동시에 아이 입으로 숟가락을 연신 갖다 대 떠 먹인다. 이후부터는 새벽에 깨지 않고 잘 재우기 위해 아이와 최선을 다해 체력 빼기(놀아주기)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는 회사 일을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농담하는 선배를 보며 나는 집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나와 내 일 간에 거리 두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회사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면, 회사에서는 일과 나는 의식적으로 분리를 시켜서 생각하는 게 맞았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짬바’를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거다. 그렇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가늘고 굵게 해야 하는 보통의 직장인들이라면 더욱더 갖춰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정신으로 길고 꾸준하게 벌어야 하니까.


Photo by Forest Simon on Unsplash


keyword
이전 07화타이어 바람을 빼고 사막 건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