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키지 않아서
윗선에서 지시가 떨어진 일이 있었다. 여러 팀과 뭔가를 기획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시켜서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다 보니 하기가 싫고 귀찮았다. 대강 이렇게 해야겠다 계획을 짠 뒤 퇴근하고 집으로 갔다. 자기 전 빈둥거리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주어진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일을 이렇게 해봐야겠다. 저렇게 해봐야겠다 하는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잠이 들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 업무 메모장에 메모를 해 두고는 잠을 청했다.
다음날이었다. 출근해서 전날 밤 준비했던 대로 일들을 해 나갔다. 타 부서는 타 부서 나름대로 준비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한 데 모여 정리되지는 않았기에 회의를 잡았다. 그리고 회의에서 정리한 내용들을 공유하고, 추가로 해야 할 일을 배분했다. 그리고는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이 행사에서 이벤트 같은 걸 하면 어떨까요?”
“아… 저희 부서는 예산이 없고, 행사 준비만 하면 된다고 들어서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조금 아쉽네요.“
아이디어가 실현되지 않는 게 못내 아쉬웠다. 회사 친구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런 저런 팀 사람들을 알려주었다. 그들에게 연락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바로 자리로 와 연락을 돌렸다. 행사를 홍보하는 팀에 연락하고, 공지를 해 주는 팀에 연락을 했다. 다행히도 내가 생각한 대로 그들이 움직여주었다. 그리고는 좌절된 아이디어를 윗선에 보고했다. 담당자 선에서는 진행이 어려우니 시간이 되실 때 윗분들끼리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말을 했다. 윗선도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완벽하게 아이디어가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시도는 한 셈이었다. 뿌듯했다.
처음엔 분명 누군가가 시켜서 한 일이었다. 재미가 없었다. 점차 내 생각이 더해지고, 여러 사람의 도움이 생기니 시킨 일이 내 일이 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일이 되었다. 그랬더니 일이 너무 재밌어졌다. 네 잎 클로버를 만날 확률보다 낮은 게 바로 내 일에 재미를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 난 돈을 받으면서도 무척 행복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