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이담 Oct 02. 2024

멈추는 달리기

실력과 여유 그리고 선한 마음에 대해

오늘은 아들의 운동회 날이었다. 마냥 신나 했던 아이의 장기자랑 같은 달리기도 구경하고, 즐겁게 사진도 찍었다. 처음엔 아들이 어떻게 경기하는지에만 관심이 갔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다른 학년 아이들이 하는 경기도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내가 어땠었지 하는 생각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고학년 친구들의 계주 경기였다. 청팀과 백팀 주자가 반바퀴씩 달리기를 이어나가면서 엎치락뒤치락하는 흥미진진한 경기가 계속되었다. 마지막 주자가 나왔다. 딱 보기에도 실력이 가장 뛰어나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었다. 청팀 주자가 먼저 바턴을 받아 달려 나가고 있었는데 백팀 주자가 긴 다리로 무섭게 달려 나가더니 청팀을 추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청팀 주자가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아...."


나 말고도 다른 학부모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경기가 참 아쉽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던 와중에 백팀 마지막 주자가 청팀 주자가 넘어진 걸 보고는 갑자기 달리기 속도를 줄였다. 거의 멈추었다. 청팀 주자가 일어나 다시 달리기까지 운동장에서 아이를 기다려 주었다. 청주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달리기를 이어나갔다. 백팀 친구도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속도를 조금 맞춰 주는가 싶더니 막판에는 스피드를 올려 결국 백팀 친구가 근소한 차이로 경기에서 이겼다.


"와~~~!!!!"


운동장이 떠나가라 함성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살짝 멍해졌다.


그런 경기는 처음 보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모든 운동회를 통틀어서 중간에 달리기를 멈추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와... 너무 멋진 친구다.'


보통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보통의 자신감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손쉽게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그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넘어진 친구를 기다려주고 함께 달리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나갔다. 


'저 친구는 어떤 부모님 밑에서 자랐을까?'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부모가 저렇게 훌륭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를 키워냈을까. 나도 그렇게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아니 나부터가 그런 마음씨를 갖고 살 수 있을까.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심리학 실험 결과를 이야기해 주는 영상을 보았다. 이야기인즉슨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발표를 준비시키고 나서 A장소에서 B장소로 이동해서 발표를 하라는 과제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소를 이동하는 길 중간에 연기자를 투입해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연기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도 없고 피실험자와 심장발작이 일어난 연기를 하는 사람만 있는 그 상황에서 이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조사해 보았다고 한다. 


연구결과 중 심리학자들이 세웠던 가설과 달리 신학생들의 신앙심, 지적 수준, 부유함과는 남을 돕는 행위가 별다른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가장 관련이 깊었던 사실은 의외로 A장소에서의 출발시간이었다. 출발시간이 여유로웠던 사람은 남을 돕는 확률이 높았고, 몇 분 남기지 않고 출발했던 사람은 아픈 사람을 본체만체하거나 혹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갈 길을 갔다고 한다.


달리기 경기를 보면서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치열한 경기 중간에 친구를 기다릴 줄 알았던 백팀 주자는 이 경기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친구를 기다려주었다가 다시 달리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아이 었을 거다.


회사에서의 나 또한 열심히 궤도 안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보통의 친구들 같다. 목표를 설정하면 그걸 쳐내기가 바빠서 남들을 헤아려주기 어렵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도움의 손길을 벌리는 사람들에게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짜증이 난다. 조금 만만한 동료들에겐 실제로 볼멘소리를 하곤 한다. 오늘 돌아보니 내가 참 여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이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가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내가 여기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내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이다. 더 나아가 내 일을 잘하면서 타인에게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실력을 갖추는 일도 참 중요하겠다는 생각도 조금 해보았다.


우선 내일은 조금 쉬어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너 T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