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아도 괜찮은 이유, 남이 맞으면 안 괜찮은 이유
“아.. 우산 놓고 왔네.”
며칠 전이었다. 집을 나와서 지하 주차장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하나둘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다시 집에 돌아가 우산을 챙겨 올 정도의 빗줄기는 아니어서 그냥 회사로 가기로 한다. 지하철로 가는데 빗줄기가 더 거세진다.
‘에이. 아까 그냥 집에 가서 우산 가져올 걸…’
출근하는 사람들 속에서 조심조심 물 묻은 패딩을 조금 털어내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아!’
생각이 났다. 이 비는 오랜 화재를 진압시켜 줄 고마운 비였다. 출근길에 맞는 비라고만 생각하니 불쾌했지만, 여러 사람이 제발 비라도 시원하게 와서 불을 꺼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비라고 생각하니 고마웠다. 나 중심으로 살다 보니 다 잊어버렸다.
‘딸에 대하여’라는 영화를 봤다. 보려고 본 건 아니었다. 넷플릭스를 돌려보다가 나온 독립영화였다. 거기선 동성애자 딸을 가진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여자는 요양원에서 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맡은 노인 중 한 명은 젊은 시절 여러 명의 아이들을 후원한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요양원에서 홀대를 받는다. 요양사일 뿐 가족이 아닌 여자는 자꾸만 그 노인이 자기 딸과 겹쳐 보인다. 동성애자 딸이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운동을 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털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했던 노인과 닮아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꾸만 노인의 편에 선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뭐도 아닌데 자꾸만 노인을 지켜주고 싶고 보살펴주고 싶다.
오지랖.
이 단어가 생각이 났다. 영화에서의 여자의 오지랖, 그건 내 딸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개념의 확장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나의 경계가 넓어진 사람이 오지랖을 부린다. 남을 더 생각하게 된다. 나만 생각한다면 모른 척할 수 있었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나만 생각한다면 짜증 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게 된다.
나도 조금 더 오지랖을 부릴 수 있는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나를 생각하듯 조금만 더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