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모네이드를 만들며 살기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올레길도 걷고, 한라산 중턱의 오름도 올랐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러 커피와 디저트 빵도 즐기고, 집에 오는 길 빵도 잔뜩 사 왔다. 마트에 들러 양가 어르신들과 우리 집에 보낼 귤도 세 박스 사서 택배로 부쳐버렸다.
마음이 든든해져서 집에 돌아왔다. 친정 엄마에게 곧 어마어마한 귤박스가 도착할 거라며 큰소리도 뻥뻥 쳐두었다. 큰소리를 너무 쳤었나?
첫 번째 불행이 찾아왔다. 빵 봉지를 열었는데 빵 개수가 맞지 않았다.
'어쩌지. 하나가 빠져있네.'
속상했다. 맛있는 빵이라고 넉넉히 사 온 건데 하나가 빠지다니. 그냥 지나치긴 뭐해서 가게에 전화를 했다.
뚜르르. 뚜르르.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어제 제가 가게에서 빵을 샀는데요. 토마토 치아바타 두 개를 주문했는데 오늘 열어보니 한 개만 들어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어머 그러셨구나. 혹시 몇 시쯤 주문하셨는지 기억하실까요?"
"네에. (전화기로 카드 내역을 찾고는) 두 시 오십 분쯤이에요."
"아 맞네요. 죄송해요~ 차액은 바로 환불해 드릴게요. 제가 전화주신 번호로 문자 드릴 테니 계좌번호 넣어주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곧 문자가 왔다. 생활비 계좌번호를 보내주었다. 가게 주인은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맛있는 빵을 더 먹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즐거운 저녁 되시라고 문자를 마무리했다. 주인은 다음에 와서 말씀 주시면 빵 하나를 더 주겠노라 답장을 해왔다. 그래, 좋은 마무리였다.
다음날이 됐다. 내가 보낸 귤이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는 택배사 문자를 받았다. 곧 엄마가 이렇게 예쁜 귤은 처음이라며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셨다.
'아주 흡족하구먼!'
그런데 조금 있다가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귤을 까보니 귤 속이 오래된 것처럼 말라있다고 했다. 분명 팔기 어려운 상태인 귤인 것 같은데, 한번 확인해 보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귤을 사면서 옆 매대에 있던 귤을 먹어보았는데 분명 맛이 좋았었다. 박스에 있던 귤과 다른 품종이어서 그랬나 보다. 더 크고 좋은 걸 선물한다고 사보냈는데 상태가 좋지 않다니, 조금 속이 상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네이버 지도로 농협 연락처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여보세요~ 농협 농수산물 센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그저께 귤을 세 박스를 샀는데 물건이 좋지 않아서요."
"아 네네. 저희가 이 제품을 납품처에 확인을 해야 해서, 혹시 사진을 좀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네네, 알겠습니다."
때마침 우리 집 귤도 도착을 했다. 시부모님께도 전화를 했더니 같은 상황이어서 모두 다 사진을 받아서 농협 담당자 연락처에 사진을 모두 보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전화를 했다. 담당자는 미안해하며 귤 값을 환불해 주겠다고 했다. 전날 매대에서 사서 맛본 귤은 맛이 좋았는데 양가 부모님께 선물로 보낸 것이니 그 귤로 바꿔서 한 박스를 보내주면 어떻겠냐고 이야기를 했더니 더 좋다고 이야기를 했다. 좋은 걸로 잘 골라 보내겠다는 말과 함께.
20대의 나였으면 화부터 냈을 거다. 그리고 내 감정을 소모하는 데 에너지를 쏟으며 힘겹게 상황을 수습해 나갔을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속상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조금 생각을 해보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을 거다. 그렇다면 화내지 말고 그냥 수습을 해나가자. 그것도 내가 좋은 쪽으로.
서양 속담에 누가 나에게 신 레몬을 주거든 그걸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먹으라는 말이 있다. 맞는 이야기라고는 생각했지만 내가 그렇게 할 줄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알겠다. 내게 말라비틀어진 귤이 온 건 속상한 일이지만, 거기서부터 내가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에 따라 상황은 잘도 변한다. 조금만 더 노력하고 조금만 더 배려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 좋아질 수도 있다.
훗, 덧붙이면 그게 다 소재가 되어 글도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