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헉! 위원장(과장님)의 눈빛이 이상한데? 이대로 찍히는 건인가? 어린이 책 목록은 도서관 책 구입 담당자가 했는데 왜 나한테 저런 걸 물어보지?‘
2019년 1월 1일 자로 새로운 도서관으로 발령 나자마자 정신없이 겨울독서교실을 진행하고 낯선 도서관과 어린이실 적응도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다. 담당자가 목록을 검토해 달라고 도서 목록을 미리 주었으나 내가 주도적으로 발언을 해야 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들어가는 도서 선정위원회라 분위기를 잘 몰랐던 것이다.
작은 도서관은 자료실 담당자가 구입할 도서를 선정하기도 하지만 우리 도서관은 한해 도서 구입 예산이 약 1억 7천만 원이기 때문에 수서만 하는 담당자가 따로 있다. 3명의 외부위원이 포함된 10명의 자료 선정위원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구입 도서를 심의한다. 첫 번째 선정위원회에서 ’할 말이 없다‘는 망언을 날려 망신당한 후에는 회의 들어가기 전에 어린이 도서 심의 목록을 철저히 검토했다.
한 번은 <xx 시리즈!> 20주년 기념 판이 출간되어 심의 목록에 있었다. 서가에 가보니 예전 판이 오래되었긴 했지만 대출되지 않은 채로 너무나 가지런히 있는 거다. 아무래도 우리 도서관 어린이들의 취향은 아닌 것 같다고 회의 때 말씀드렸다. 결국 다른 위원 전원 동의로 구입하지 않기로 결정!
도서관 생활은 거의 20년 가까이했지만 어린이자료실 쪽은 초짜라 어린이 책을 검토하는 것이 버거웠다. 종합자료실장님은 자료실 경험이 많으시고 도서에 대한 상식이 풍부하셔서 말씀하실 때마다 나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흘러나왔다. 어린이책 검토할 때만 몇 마디하고 성인 도서 심의 때는 한쪽에 찌그러져 있는 나와 다르게 종합자료실장님은 성인 책을 꼼꼼하게 검토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이 책까지 챙겨주셨다. 담당자가 놓친 어린이 분야 최근 수상작이나 화제의 신간까지 브리핑해 주신다. 한 번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그림책이 어린이 자료실에 없다고 지적하셔서 깜짝 놀랐다. 아마도 책이 오래돼서 파손 등으로 폐기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그림책이라는 것도 있었나?' 놀란 내 눈이 커지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선정위원회 들어갈 때마다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을 느낀다
새로이 알게 된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그림책
<백두산 이야기/류재우/보림>
백두산의 탄생 설화를 모티브로 우리 민족의 삶과 혼을 닮았다는 그림책!
백두산이야기/류재우/보림
수서자가 심사숙고하여 구입 예정 목록을 만들어도 선정 회의에서 상당 부분 제외된다. 예를 들면 작가 xxx의 종교 저작은 이미 많이 구비되어 있고 대출률이 높지 않아 구입 자제, xx 출판사에서 교과 보조자료로 문학작품 요약분이 출간되었으나 내용이 충실하지 않고 어린이들이 작품 전체를 읽지 않고 요약본에 의존할 수 있으므로 구입 자제, 엄마표 영어 도서의 경우 최근 출판 비중이 높고 대출률도 높지만 비슷한 내용이 중복되고 기 소장 도서가 많으니 구입 자제 등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제시된 의견들은 위원들의 열띤 토론을 거쳐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
도서 선정 위원회에서는 다양한 민감 사항도 다룬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책에 대해 구입을 희망하는 민원과 혹은 비치된 책을 없애달라는 민원이 동시에 올라온 경우 한쪽으로 편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위원회에 회부하여 결정한다. 외설이냐 교육이냐를 두고 이슈화되었던 성교육 책에 대해서도 이용 제한 여부를 결정한다.
최근에는 x 출판사에서 저작권 소송 승소 후 xx 도서 대출 정지 및 폐기 요청 공문을 보내왔다. 하지만 환불을 해주지 않는 일방적인 폐기 요청은 도서관 예산을 들여 구입한 것을 고려해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사안으로 선정위원회에서는 잠정 보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작년 12월에 대법원에서 원심을 깨고 저작권법 위반이 아니라는 판결을 냈다. 담당자 한 사람이 공문만 보고 폐기하거나 이용 제한을 했으면 아까운 책이 버려질 수도 있을 뻔한 것을 위원회에서 살린 것이다.
회의가 끝날 때마다 도서 선정위원회에서 이렇게 열심히 토론한다고 녹음해서 지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책 한 권 때문에 미묘한 감정싸움이 날 정도로 열의가 넘친다. 토론으로 조율이 어려울 경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거수로 결정한다. 한 번은 집에서 마스크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구입 예정 목록에 올라왔다.
“요즘 인터넷 뒤지면 이런 정보는 다 나옵니다. 돈을 들여 책으로 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단정할 지을 수는 없죠. 인터넷에 접하기 어려운 분이 있을 수 있고 마스크는 시급한 현안 문제니 공공기관에서 구입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터넷 뒤지면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왜 돈 주고 삽니까?”
눈치를 보니 서서히 감정이 격해져서 합의가 이루어질 분위기가 아니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하나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위원장이 보다 못해 거수투표로 결정하자고 한다. 나는 사자고 주장하는 위원의 눈을 피한 채 안 사는 쪽에 살포시 손을 들었다.
한정된 예산안에서 합리적으로 책을 구매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용자의 수요에 충실할 것인가 양질의 장서 구성에 집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정답이 없다. 이용자가 원하는 도서를 신청할 수 있는 희망도서 제도가 있지만 이미 소장 중인 도서는 제외된다.
보고 싶은 책이 항상 예약 중이라는 민원을 생각하면 수요에 충실한 게 맞는 것 같다. 도서관에 근무하는 나도 보고 싶은 최신 책이 대출 중이라 속상할 때가 많다. 그래서 도서관에서는 책의 소장 가치와 수요를 고려하여 선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복본을 구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도 유행이 있어 한때 인기가 많아 여러 권 구입한 책들이 시간이 지난 후 서가에 나란히 꽂혀있는 경우가 많다. 책도 한 철이 있는 건가 싶어 볼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새로운 책이 매달 쏟아지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는 바도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다고 무조건 여러 권 구입해서는 안 되고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
정답이 없기에 도서 선정위원 회의는 오늘도 뜨겁다. 보직이 바뀌어 올해부터 들어가지 않게 되어 아쉽다. 2년 동안의 추억을 되시기며 글을 마친다.(눈물 찔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