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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검 Apr 30. 2020

[언어] 나의 중국어 도전기

초짜 주재원 업무를 위해 실전 중국어를 배우다

우공이산(愚公移山)

 - 열자(列子)        


무식하면 용감하다

 - 무명 

                                     



 중경 도착 다음날 첫 출근날이다. 사무실에 들어왔다. 20대, 30대 직원 스무 여명이 앉아 있었다. 다들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도 직원들의 눈치를 봤다. 탐색전이다. 과장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무언가 설명을 한다. 아 중국어다. 무슨 말이야(什么意思?) 중국어 수업 시간에 가장 자주 사용하던 표현을 한 번 써본다. 아 새로 온 부장님 중국어 잘 못하는구나. 나의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다시 들어보니 시간을 물어보고 있다. 업무 보고를 언제 받겠냐는 뜻인 것 같다. 이제 중국어로 일을 해야 하는구나. 두려움이 몰려왔다.


 전임자는 중국에서 대학을 나와 중국어가 유창했다. 부서에 통역 직원이 따로 없었다. 중국 소재 한국 회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교포(조선족) 직원도 한 명 없었다. 압박감이 몰려왔다. 주재원 파견 전 회사 아침 중국어 수업을 3년 동안 빠지지 않고 열심히 들었었다. 하지만 중국어 전공자가 아닌 내 중국어 실력은 업무를 하기는 충분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는 중국어 선생님과 대화 형식의 수업을 했다. 묻고 답하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10분 이상 업무 설명을 그저 듣기만 하며 이해하는 훈련을 해 본 적이 없다. 과장들이 현황과 문제점을 설명하며 나에게 어떻게 하면 되나요 해결책을 물어온다. 중국어 설명을 듣기 시작한 후 내가 1-2분 만에 정신이 혼미해져 가고 있음을 직원들은 모르는 듯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는 단어가 나의 뇌 한쪽에 어지럽게 쌓이기 시작한다. 오롯이 내용에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초등학교 명상의 시간 이후 다시 처음으로 나 자신을 고찰하기 시작한다. 시작이었다.


 고심 끝에 통역을 생각했다. 한국어과를 졸업한 한족 직원이 두 명이 있었다. 둘째 날 아침 나는 직원과 대화를 하기 위해 한국어과 졸업자를 불러 통역을 시켰다. 직원과 대화를 해도, 회의를 해도 시간이 두배로 걸렸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보다 업무는 두 세배가 늘었는데 속도는 두 배로 느려졌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묘수가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 눈을 감고 생각했다. 피해 갈 수 없다면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어떻게든 해보자. 나는 통역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돌이켜보면 주재원 기간 중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


 이건 어학연수도 아니고 유학도 아니다. 실무고 실전이다. 당장 일을 해야 한다. 직원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긴장감이 몰려왔다. 셔츠 안쪽이 땀에 젖어왔다.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많다. 집중해야 한다. 집중하려면 버려야 한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말과 글 중 우선 글, 즉 읽기 쓰기는 버리자. 지금으로서는 사치다. 말에 집중하자. 말도 말하기, 듣기 중 말하기는 일단 포기하자. 듣기에 집중하자. 듣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지? 어휘다! 결론은 어휘였다.


 왜 글자는 처음에 포기했어야 하나. 중국어는 표의문자라 글자, 발음, 뜻 세 가지를 동시에 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입 구(口) 자라고 한다면 글자 '口', 뜻 '입', 발음 'kou'에 성조 2성까지 다 외워야 한다. 중국어 한자에 입 구 자처럼 쉬운 글자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국어 모든 한자 수를 다 합치면 3만 자가 넘는다고 한다. 생각도 말자. 중국 교육부가 발표한 통용 규범 한자 모음은 총 8천 자 정도다. 이도 무리다. 통용 규점 한자 중 의무교육에서 알아야 할 필수 한자가 대략 3,500자 정도 된다고 한다. HSK 5급을 위해 2,500자, 6급을 위해 5,000자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업무를 위해 알아야 할 글자가 적어도 대략 3,000자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늘 당장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글자를 하나씩 외우는 방식은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아이가 언어를 배우 듯 소리로 배우기로 결심했다.


 날마다 그날 들은 새로운 단어를 적기 시작했다. 글자(한자)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발음과 뜻에 집중했다. 다음, 네이버 사전은 축복이었다. 언제든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사전을 사용할 수 있었다. 뜻을 모르면 필기 인식도 된다. 사전뿐만이 아니라 검색했던 단어를 모아서 다시 볼 수 있는 기능도 있었다. 컴퓨터 홈페이지를 네이버 사전으로 지정했다. 스마트폰도 누르기 가장 편한 위치에 사전 앱을 설치했다. 중한, 한중사전, 발음 청취, 필기인식이 다 되는 이 위대한 프로그램이 무료였다. 새 단어를 모아 둔 단어장은 순서대로 발음, 뜻을 오디오로 틀어놓을 수 있었다. 차에서, 집에서 듣고 또 들었다. 심지어 잘 때도 들으면서 잠이 들었다. 한국어와는 다른 중국어 발음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이렇게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들리지 않았던 문장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전이라면 웅성웅성 의미 없는 소리 덩어리들로 느껴졌을 법한데 그중 몇몇 단어들이 귀에 잡히기 시작했다. 마음이 살짝 놓였다. 여기서 죽지는 않겠구나.  


 영어 배울 때의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영어를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배웠던가. 들으면 이해가 안 가는데 읽으면 안다. 듣기보다 읽기를 우선하는 교육은 거꾸로 된 교육이다. 단지 시험을 위한 교육이다. 아이가 말을 배우 듯 절대적인 듣기 량이 확보된 후 말하기, 읽기, 쓰기 순서대로 확장해야 한다. 아이가 첫 말을 하기 전까지 짧게는 2년, 보통은 3년이 걸린다. 이 2-3년의 시작은 발음 체계에 적응하여 소리 분별법을 익히고, 음과 뜻을 연계하고, 단어 간 패턴을 이해하는 시기이다. 아이의 학습과 동일한 순서로 배우되 더 신속히, 압축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듣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말하기를 시작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완벽하고 정식적인 표현보다 직원들이 자주 쓰는 표현을 따라 했다. 아이와 같이. 그것이 내가 채용한 방법이었다. 직원들이 내가 전에 몰랐던 새로운 표현을 쓰면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따라 했다. 자주 쓰는 표현들은 노트 앱에 적어 혼자 있을 때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가까운 직원에게는 이 발음이 맞나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조언이 필요했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 문화에서 감히 부장의 발음을 고쳐주려는 직원은 없었다. 다 비슷해요(差不多)라고 대답만 했다. 사전 앱 발음을 무작정 따라 했다. 성조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어 쏼라쏼라 시끄럽다고 생각한다. 성조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발음이라도 성조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예를 들어 옌(3성)징(1성)이라고 하면 얼굴에 있는 눈이라는 뜻이지만 옌(3성)징(4성)이라고 마지막에 떨어지는 성조로 발음하면 안경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발음인데 왜 다른 뜻이 되지? 나중에 이것이 바로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상응하는 한글 글자를 생각하지만 중국 사람은 소리+성조를 들으면 그에 매치되는 한자를 생각한다. 소리가 같더라도 성조 차이로 가리키는 한자가 다르니 다른 뜻이 되는 것이다.  


 1년이 지나자 주어진 상황에 필요한 문장이 로봇처럼 튀어나왔다. 응용보다는 각 상황에 맞는 최적의 기본 문장을 준비해 놓고 주요 단어만 갈아 끼우는 방식이다. 듣기, 말하기가 어느 정도 되니 다음은 읽기, 쓰기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익숙해지기 전까지 직원들이 보고서를 가지고 오면 직접 불러 말로 설명하게 했다. 처음 1년 나는 글자를 못 읽는 문맹 부장이었다. 1년이 지나자 애벌레 그림 같았던 한자가 뭔가 뜻을 가진 형상으로 인식되는 기적이 문맹 부장에게 일어났다. 보고서의 제목, 간략한 이메일 내용은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기적은 포털 사이트의 새로운 서비스였다. 네이버에서 문자 자동 번역 시스템 Papago를 출시한 것이다. 문장 또는 문단 단위로 번역하고 모르는 단어는 마우스 포인터만 대면 뜻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찍어 글자 인식한 후 번역도 가능했다. 번역 품질에 아직 한계가 잊었지만 여러 장 문서 중 원하는 내용, 중요한 내용이 어디에 있는지 빨리 파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비즈니스상 정확한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결국 단어와 문법을 이해한 후 자신이 직접 파악해야 했다.


 중국에 주재원으로 오기 전 4년이 지난 후 한국에 돌아올 때쯤이면 중국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중국어 선생님은 가능하니 자신감을 가지라 말해주었다. 중국 주재 2년 반이 지나고 나는 중국 아마존에서 킨들(전자책)을 샀다. 읽다 모르는 단어를 누르면 뜻을 볼 수가 있었다. 중중사전, 중영사전만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간단한 책은 읽을만했다. 생소한 분야보다는 관심이 많아 익숙한 경영, 경제, 역사책 중심으로 구매했다. 한국 책 읽을 때와 비교하여 속도가 많이 느렸다. 하지만 업무 이외 다른 분야의 어휘를 많이 익힐 수 있었다. 읽기가 되자 말이 아닌 이메일로 직원에게 피드백을 주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물론 처음에는 직원들이 쓰는 표현들을 그대로 복사해서 사용했다. 외운 표현들이 많아지자 레고처럼 그 표현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틀린 조합도 많았다. 어색한 줄 알면서도 '늦깎이로 배운 외국인이 이 정도면 준수하지'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의 중국어는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 성조를 헷갈리고, 문법도 자주 틀린다. 비슷하지만 뜻이 다른 한자들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는 내가 체계적으로 중국어를 배우지 못하고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실전 중국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내용을 보고 기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학교에서는 발음 체계(핑잉拼音)와 성조를 배우는데만 한 학기의 시간을 배정했다. 그다음 한 한기는 부수와 획 중심으로 기초 한자를 가르쳤다. 본격적으로 여러 한자와 문장이 나오는 것은 2학년 때부터였다. 아이는 기본만 배우는데 1년의 시간을 보낸다. 나는 부득이 압축 성장을 해야 했으니 여기저기 부실 공사가 많다. 그래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중국어로 회의를 하고, 문서를 읽고, 직원과 메일로 보고를 받고 업무 지시를 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수준이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무식한 우공이 산을 뚫는다. 무식하게 뚫었으니 여기저기 부실한 부분이 많을 테다. 그러면 어떠하랴. 뜻을 이해하고 전달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우리는 보통 우공이 산을 깎은 사실에만 놀라워하지 왜 애초에 큰 산을 깎으려고 노력했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우공이 산을 깎은 이유는 산이 두 마을 간 왕래, 소통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멋진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꾸불꾸불 시골길로라도 소통의 장벽을 극복했으니 그 정도면 일단 충분하지 않을까. 문맹을 갓 벗어난 부장은 그렇게 자신을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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