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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검 Jan 03. 2021

나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나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인간의 뇌

심신, 몸과 마음이다. 예전 사람들은 마음이 가슴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랑하는 마음을 하트로 표현한다. 하지만 심장이 살아있어도 뇌가 죽으면 감정을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한다. 마음은 가슴이 아닌 머리에 있는 듯하다. 


세상에는 기적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보면 그것이 바로 기적임을 깨닫는다. 눈도 뜨지 못하는 생명체가 젖을 빠는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고, 서서히 감정을 배우고 표현하기 시작하며, 나중에는 심지어 말까지 한다! 이를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냥 기적이다. 


그 기적 같은 우리의 마음에는 본능(욕망), 감정, 이성이 모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각각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인간의 뇌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능(욕망), 파충류의 뇌 


갓난아이도 배고픔, 배설, 균형 감각 등 생존 본능을 타고 난다. 나의 마음속에도 동일 생존 본능이 있다. 식욕, 수면욕, 성욕, 안전을 추구하는 욕망 등이다. 인간 마음속에 내재된 공격적인 성향, 권력에 순응하는 것도 본능의 일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하려 하면서도 번번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이런 기본적인 욕구가 얼마나 강하고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본능과 욕망은 우리 삶을 지속하는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감정, 포유류의 뇌


아이가 자라면서 유대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난다. 부모와 함께 있고 싶고, 부모로부터 적극적인 리액션과 피드백을 요구한다. 어른이 된 나도 표현을 그렇게 하지 못할 뿐이지 동일하다. 끈끈한 인간관계, 소중한 사람으로 이해받고, 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파충류는 알에 태어나자마자 독립적인 생활을 하지만 포유류는 끊임없는 부모의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다. 육아 시 스킨십과 감정적 유대감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부분이 부족한 사람이 커서 동감 능력을 잃어버리는 사이코 패스가 되는 것이 아닐까. 


기쁨, 슬픔, 분노, 혐오, 공포, 경악 여러 감정이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때로는 이런 감정에 휩싸여 나중에 후회할 말이나, 후회할 '짓'을 하고 만다. 감정은 우리 삶을 생동감 있게도, 후회스럽게도 만든다.   



이성, 인간의 뇌


아이가 크면서 화를 내고는 스스로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서 "이제는 다 컸구나" 생각도 든다. 이기고 싶은 본능과 그러지 못했을 때의 슬픔,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험한 말을 하고는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만이 가진 이성이다. 


이성의 근원이 무엇일까, 신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일까. 이성만으로 이성을 이해하기는 한계가 있다. 유교는 인과 의, 예로 인간의 이성을 실천하려 했고, 불교는 본능과 감정의 집착을 버리는 방식으로 이성을 실천하려 했다. 스토아학파였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인상을 지우고, 충동을 억제하며, 욕망을 끄고, 이성이 너를 지배하게 하라'라고 주문했다. 이성의 중시는 인간다움과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처럼 보인다.  



어떤 마음이 진짜 나인가?


우리는 이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사회 규범, 그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면 제도적인 응징을 당한다. 사회적 제재 때문이 아니더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과욕의 나, 감정에 휩싸이는 부끄러운 나는 부정하고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도 나의 일부분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사상사를 보더라도 이성의 한계는 뚜렷하다. 인간의 이성을 신봉한 계몽주의, 더 나아가서 인간 본성까지도 개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공산주의는 역사적 파국을 맞이했다. 계몽주의는 자본주의의 탄생에 기여했지만 자본주의는 곧 모순을 드러냈고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역설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의 소유욕을 무시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주창하던 공산주의는 결국 모두를 평등하게 가난하게 했고 체제로서는 사실상 소멸했다. 모두 이성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들이다. 


요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보다는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이 환영받는 것을 보면 '내가 옳기에 따라오라'라는 이성적 호소보다는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힘을 내 계속 같이 갑시다'와 같은 동감의 리더십이 대세인 듯하다. 감정의 나, 욕망의 나도 결국 소중한 나의 일부분이다. 너무 이성적인 모습보다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모습을 '인간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라는 글자에 그런 부끄러운 모습도 같이 담겨있는 것 같다. 


이성이 내 마음을 지배해야겠지만, 그 이성이 마음속 감정과 욕망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그것 또한 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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