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싫은데”) =!
사람을 잘 싫어하는 어른 틈에서, 난 싫음의 방법론을 체득하며 자랐다. 싫어한다고 해서 싫은 표정을 곧이곧대로 내비치는 건 금물이었다. 상대가 먼저 이쪽에서 내비친 거리감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더 이상의 엄두를 못 내도록 단호한 단어들로 차가운 투명 벽을 쳤다. 떨어진 사이엔 풀이 죽었고 자연스레 공간마저 온기가 식기 마련이었다. 어색한 공기를 메워보겠다고 어쩔 줄 몰라할 필요는 없었다. 오래된 이층 집의 웃풍 탓이었는지, 냉골을 오래간 버텨온 사람의 기운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색함도 웃풍처럼 견디면 결국엔 지나간다는 걸. 본인의 뜻을 상대가 받아들일 때까지 그저 기다려주면 되는 것이었다. 넉넉하면서도 단단한 엄마의 얼굴에서 나는 싫어함을 소화하는 방법을 배웠다. 싫은 것들을 푸짐하게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뚝배기에 넣고 뜨겁게 끓여 뭉근하게 만든 후 맛있게 해치우면 되는 것이었다. 운이 좋은 날엔 기분까지 시원-하게 좋아졌다.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채로 방치하고 살다가 싫어하는 것으로 똥을 싸는 날도 생긴다. (비유다) 내 온몸에 싫어하는 것들이 덕지덕지 잔뜩 묻어있으면, 정말 운이 안 좋은 날엔 그냥 구린내 나는 내 자신이 싫어져버린다. 제이레빗의 Happy Things라는 노래의 반대 버전으로 그 냄새나는 싫음 들을 나열해 보자면. 지하철에 탔는데 다리를 쩍 벌리는 사람이 내 양쪽에 앉아 있을 때,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타인이 나에게 물을 털고 나갈 때, 사무실에서 창문을 열어달라는 의미로 “창문을 누가 닫아~야겠~네”라고 타인을 향해 매번 노래하는 선배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크게 통화하는 사람과 20층 정도는 같이 올라가야 할 때, 은연하게 급을 나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을 한 명 더 알게 됐을 때, 그리고 싫음 들을 떠올려서 쓰다가 괜히 그때 생각이 나서 짜증 났을 때 등이 있겠다.
물론 위에서 나열한 것들에 매번 넉넉하고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울 엄마도 그날의 컨디션과 기분 그리고 습도에 따라 패턴이 달라지는데, 엄마보다 덜 산 내가 어떻게 더 잘 대처하겠나. (비겁한 문장이다) 괜히 지하철 좌석에서 개최된 프라이빗 쩍벌 배틀에서 지기 싫었던 날에는 덩치로는 엇비슷하니 못 할 것 없다는 생각에 다리를 쩍 벌려보기도 했고. 화장실에서 물을 터는 타인의 손길에 아주 빠르게 반응하며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을 보여주기도 해 보고. 창문을 닫아달라는 세레나데에 “그러게요 누~가 닫게 될까요~” 답가를 불러보기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시끄럽게 통화하는 이에게는 볼륨을 낮춰달라고 아주 쪼그만 수신호를 보내보기도 했다. 그러다 이렇게 글로 쓰고야 말게 되기도 했는데. 이거, 이거 영 기분이 찜찜하다. 대쪽 같은 우리 엄마의 딸다운 행보가 아니란 말이다.
싫어하는 것들을 굳이 굳이 활자의 형태로 두고 싶지 않음에도, 이 글을 쓰게 된 건 『좋은 사람 도감』이라는 책 때문이다. (너무 영화 리뷰 유튜버의 흐름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이쯤에서 들지만. 내빌내읽. 내가 빌려 내가 읽은 책이다) 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학습으로 동네 도서관 수업에 갔다가 빈 책상에 앉아 있기가 그래서 요 책을 빌려 내 자리 책상 위에 올려두었더랬다. 싫어하는 행동을 일컫는 “싫은데”에서 비롯된 “좋은 사람”의 행동을 표현한 만화 100가지와 몇몇 칼럼이 함께 실려 있다. 책 제목이 좋은 사람 도감이라는데. 그 표본들에 나라고도 할 수 있는 행동들이 꽤 많이 수집되어 있다. 타인의 그 행동이 너무 싫어서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며, 반대로 행동했던 작은 역사 말이다. 극명한 불호에서 비롯된 나의 성격이 어쩌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호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흑백 색 뒤집기 보드게임인 오셀로 게임을 하듯이 그렇게 청개구리처럼 살아왔나 보다. 그런 나의 아득바득함이 뿌듯해서 쓰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