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미우면 사랑해 버려요
얼마 전, 다비치 이해리 씨의 결혼식에서 강민경 씨가 낭독한 축사 영상이 화제였다. 15년을 팀으로 함께한 두 사람의 끈끈한 애정이 담긴 글에 나 역시도 뭉클해졌다. 문득, 내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어느 결혼식의 축사가 떠올랐다.
주말마다 결혼식 가는 게 직업이었던 적이 있었다. 대학생 때, 나는 웨딩 영상 작가로 2년 정도 일했다. 매주 주말이면 커다란 삼각대와 캐논 80D 카메라를 들고 서울의 예식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요즘은 주례 없는 결혼식이 트렌드라, 신랑 신부가 직접 마이크를 들고 자신들만의 혼인 서약과 성혼선언문을 낭독한다. 이후에는 신랑이나 신부의 부모님이 단상에 올라와서 준비한 말씀을 들려주신다. 어떤 분은 입을 떼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기도 하고, 어떤 분은 자녀의 태몽부터 성장 에피소드까지 신나게 얘기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결혼식에 참석해 주신 하객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느라 정작 신랑 신부를 향한 덕담은 뒷전이 되기도 하고...
그 중 나는 아직까지도 어떤 '부모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신부의 아버지였다. 단상에 서서, 와 주신 내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준비한 짧은 덕담을 마친 신부 아버지는 축사가 담긴 종이를 덮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며 신랑과 신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선준아, 내가 은지를 사랑하는 만큼만 우리 은지를 사랑해다오. 은지야, 선준이 어머님께서 선준이를 사랑하는 만큼만 선준이를 사랑하거라. 그럼 너희들은 평생 서로 미워하지 못하고 살 수 있을 거다."
세 마디를 끝으로 그는 단상에서 내려갔고, 식은 다음 순서인 축가로 이어졌다. 카메라를 다시 세팅하고 그 말을 곱씹다가, 짧은 문장 안에 담긴 큰마음을 이해하고 문득 코끝이 시큰해졌다. 웨딩드레스 입은 딸을 바라보는 신부 아버지의 눈빛에서 큰 사랑이 느껴졌다.
한 예능에서 영화감독 이옥섭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만약에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 버려요." 사람을 엄청나게 미워하는 걸 멈추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쓴다는 이 감독처럼, 나 역시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 마음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고안한 나름의 방법을 갖고 있었다. 그날 신부 아버지의 축사를 들은 후부터였다. 내 성향이 아주 너그럽진 않은 탓에, 어떠한 단계도 없이 미운 사람을 그냥 사랑해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누가 미우면, 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사람을 떠올린다. '그래, 나는 당신이 밉지만, 당신 부모님은 당신을 너무 애틋하게 사랑하겠지?' 그 사랑을 내 마음에 입혀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웬만큼 얄미웠던 마음은 어느새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아주 미운 사람의 부모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애틋하게 사랑하며 키웠을지를 생각하면, 다 큰 자식이지만 아직까지도 언제 어디서나 그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을 향한 내 안의 뾰족한 감정은 점점 힘을 잃는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영영 미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당히 둥근 마음을 남겨 두었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 보자면, 몇 달 전, 친한 언니의 집에 놀러 갔다.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 정치인 비리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제 100일이 좀 지난 첫째 딸을 품에 안고 있던 언니는 한없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 부모님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길렀을 텐데, 왜 저렇게 컸을까." 별생각 없이 과일을 먹고 있던 나는 언니의 말에 새삼 놀랐다. 아이를 낳은 언니의 마음에 엄청난 사랑의 부피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우주보다 큰 세계를 알게 되면,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사람마다 성격도, 취향도, 역할도, 도덕의 울타리도, 용납 가능한 행동의 범위도, 농담으로 받아들여지는 농담의 수위까지도, 모든 게 전부 다 다르기에... 살다 보면 자잘한 이유로 미워할 사람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미운 감정을 눈덩이처럼 굴려 키우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은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의 대상임을 떠올려 보자. 그러면 미운 감정은 그 사랑에 짓눌린 듯,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점점 힘을 잃고 작아질 거다. 그런 마음이 되면 사실 미워하는 이유 역시 별 거 아니었다고, 충분히 풀어나갈 수 있는 갈등이었다고 납득하며 관계를 다시 쌓아 나갈 수 있다.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미워한다고 느낄 때면, 존경하는 나의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라는 걸 상기한다. 그러면 어깨 펴고 당당하게 나아갈 용기가 생긴다. 더불어, 더는 미움 받지 않도록 반성해 보고 발전할 용기도 생길 거다.
몇 년 전에 결혼한 그 부부는 잘살고 있을까? 부대껴 살아가며 서로 미울 때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만큼을 서로에게 베풀도록 노력하며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