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푸드를 먹은 날

질긴 닭 뜯기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by 부크럼


매달 대여섯 개 정도 소소한 버킷리스트를 쓰고 있다. 혼자 인생 네컷 찍기, 한 번도 안 가 본 산 가기, 벽 떼고 시르사아사나 1분 버티기 등등. 12월이 되고 올해를 마무리하는 달의 버킷리스트를 고민하다가 문득 ‘소울 푸드 먹기’라고 적었다. 무작정 적은 후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의 소울 푸드는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소울 푸드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요리를 뜻한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버터 빈스, 옥수수빵, 프라이드치킨 등이 있다. 미국 남부에서 노예 제도를 통해 태어난 이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을 뜻하는 말이지만 ‘소울’이라는 단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고향을 생각나게 만드는 음식’, ‘위안을 주는 음식’, ‘추억이 담긴 음식’ 등의 의미로 변형되어 쓰인다.


이 모든 것을 총합한 음식을 떠올려 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폐계닭’이었다. 이름부터 생소한 이 음식은 오로지 평택에서만 파는 것으로, 이 음식을 먹으려면 평택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평택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마을버스로 30분이면 평택에 갈 수 있는 안성에서 대학을 다녔다. 안성에 있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은 나의 소울, 그러니까 나의 탄생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부모님의 모교이자 두 분이 함께 청춘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전공이었던 문예창작으로 입학해서 아버지의 전공이었던 사진을 복수전공하며 나 또한 청춘의 일부분은 안성의 예술대학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지라 안성의 고즈넉하고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는 내게 좋은 영감을 주었다. 교양 수업이 끝나고 전공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음악을 들으며 가로질렀던 넓디넓은 캠퍼스, 계절마다 다채로운 논밭 뷰가 펼쳐지는 대도서관, 가까이 오면 소리를 지르는 고니가 있는 호숫가…… 스물셋, 늦깎이 대학생으로 입학해서 언제나 혼자 바쁘게 동동거렸던 터라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귈 틈은 없었으나 고요한 학교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언제나 충만해졌다.


수업이 일찍 끝난 날에는 종종 평택에 갔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안성 시내에 CGV가 생겼다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가장 가까운 CGV는 평택역에 있었다. 평택역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어느 날, 간만에 정말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학교 근처에는 식당이 몇 군데뿐이었고 기숙사 학식도 늘 비슷하게 나와서 무언가 새로운 걸 찾고 싶었다.


검색하다 발견한 음식점이 바로 ‘폐계닭’ 전문점이었다. 블로그에 포스팅된 사진을 보니 납작한 냄비에 담긴 것은 닭볶음탕도, 닭갈비도 아닌 생소한 비주얼이었다. 뭐든 궁금한 건 참지 못하기에 나는 곧장 군계폐계닭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는데도 폐계닭을 안주 삼아 소주를 드시는 어른들이 많았다. 사장님은 낡은 냄비에 담긴 폐계닭을 내 앞에 놓아주시며, 비닐장갑을 끼고 힘껏 뜯어 먹으라고 알려 주셨다. 새빨간 양념에 후추 향이 강하게 나는 닭 요리였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려 한 입 베어 무니, 왜 뜯어 먹으라고 하셨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닭은 아주 질겨서 잘 뜯기지 않았다. 그런데 입 안에 고인 양념은 살면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아주 중독적인 맛이라, 나는 곧바로 비닐장갑을 끼고 전투 모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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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는 보통 책을 읽으며 천천히 식사했지만, 그날은 양손에 비닐장갑을 낀 채로 아주 열심히, 맵고 자극적인 양념에 버무려진 닭고기를 뜯어 먹고 함께 볶아진 내장이며 쫄깃한 염통을 씹어 먹었다.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와서 언제나 더 조급했고, 무언가 빨리 이뤄내야 할 거 같은 중압감으로 알게 모르게 야금야금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종종 혼자 폐계닭을 먹으러 갔다. 기분이 아주 좋거나 아주 좋지 않을 때 더욱 간절하게 생각났다. 한 학기 내내 열심히 쓴 소설이 혹평을 들었을 때, 기대도 안 하고 쓴 단막극 시놉시스가 1등으로 뽑혔을 때, 묵혀 둔 필름 사진을 인화해서 제출했을 때 등등…… 질긴 닭 뜯기는 무언가를 기념하거나 후련하게 날려 버리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가끔, 일부러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택으로 내려가 폐계닭을 먹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계닭을 파는 그 지역이 경상도나 제주도처럼 먼 곳이 아니라 한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어서 참 다행이다.


폐계닭을 마지막으로 먹은 건 지난 10월 3일 개천절, 잠실에서 마라톤을 끝내고 나서다. 공휴일이라 원래는 쉬는 날이라고 했는데, 가게는 찾아온 사람으로 북적였다. 사장님은 직원분들도 없이 혼자 손님맞이를 하시며 폐계닭 한 냄비, 한 냄비를 뚝딱뚝딱 볶아 내셨다. 생애 처음으로 마라톤 도전을 잘 마치고 나니 폐계닭이 간절하게 생각나서, 비에 쫄딱 젖은 차림으로 평택까지 갔던 걸 보면 정말 내 소울 푸드는 의심할 여지 없이 폐계닭인가 보다.


그래서 12월 안으로 나는 ‘소울 푸드 먹기’를 하러 평택에 가려고 한다. 그 맵고 질긴 닭을 질겅질겅 씹으며, 작은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슴슴한 계란찜을 푹푹 떠넣으며, 눌어붙은 볶음밥을 싹싹 긁어먹으며, 올해도 참 고생 많았고 내년도 즐겁게 살아 보자고 다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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