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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랑B Sep 18. 2021

철학에 대한 오해

강신주, <철학VS 철학>

 철학, 하면 떠오르는 느낌이 있다. 첫째, 어렵다. 둘째, 지루하다. 셋째, 딱딱하다. 학창 시절 나에게 철학은 소설처럼 재미있지도 않은데 소설보다 더 중요하게 대접받는 얄미운 무언가였다. 윤리, 도덕 시간에 선생님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시험기간이 닥쳐야 교과서 내용을 달달 외운 다음 시험 치고 나면 까맣게 잊는 존재. 중학교 시절 도덕 선생님은 철학과 출신이었는데, 사람답게 살려면 꼭 철학을 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철학, 그거 배워서 어디에 써먹나요?'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은 일상생활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공허한 말장난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철학은 내 관심 밖이었다. 25세를 전후해 문학에 치우친 독서 저변을 넓히고자 교양인문서를 읽기 시작했지만 철학 관련 책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일단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서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쉽고 재미있는 교양서가 이렇게 많은데 굳이 머리 아프게 철학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가득했던 2012년 여름 어느 날, 신영복의 <강의>와 딱 마주쳤다. 나로 하여금 철학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 준 책이었다. 무엇보다 공자의 인의예지, 노자의 무위자연 따위만 기계처럼 외우게 하는 공교육식 지루함이 없었다. 철학을 관계론에 대입해 사유하는 방식이 신선했고, 실제 강의실 수업처럼 부드러운 문체에 이끌렸다. 책은 도끼라고 했던가? 신영복의 <강의>는 철학에 대한 오랜 편견을 나무꾼이 장작 쪼개듯 부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철학은 내 일상과 거리가 멀었다. 지루하고 딱딱하다는 편견은 버렸을지언정 '어렵다'는 두려움은 여전했다. 서점에 가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니체의 <비극의 탄생> 등을 들춰보다가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아서 도로 덮곤 했다. 책의 엄청난 두께에 압도된 탓도 있었다. 허영심이라면 허영심이겠지만 나는 책 두께가 두꺼울수록 좋아하는데, 그런 나에게도 천 페이지가 훌쩍 넘는 철학서들은 범접하지 못할 존재였다. 몇 번 그런 경험을 한 뒤, 나는 그럴듯한 철학 개론서를 찾아볼 생각도 못하고 다시금 쉽게 읽히는 교양인문서의 세계로 도망치고 말았다.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르기 마련이다. 시중에 출간된 교양인문서들은 어떤 주제를 다루든 철학과 연관이 있었다. 칼 세이건의 책이 그랬고 일본 다독가들이 쓴 독서법 책도 철학을 독서가의 기본 소양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시의 나는 참 희한하다고 여겼다. 철학이 도대체 뭐기에 모두가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걸까? 인문학 하면 문사철이고 그중 마지막이 철학이라는 건 나도 알지만 이걸 알아서 써먹을 데가 어디 있다고. 남들에게 나 이런 책도 읽는다고 과시하는 용도?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샀다. 인터넷서점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눈에 띈 책, 강신주의 <철학 V철학>을.



전자책으로 구매한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



 언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가? 지금까지 배웠던 모든 가르침들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아닌가?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다른 어떤 학설로도 그 미지의 타자나 사건을 알 수 없다는 자각! 이런 무지의 자각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게" 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자기 이성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는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강신주에 따르면 철학의 본질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스피노자의 철학에 통달한다면 나는 스피노자 전문가는 될지언정 철학자는 되지 못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배우는 것은 그의 사상을 내 머릿속에 욱여넣는 데 가깝지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스피노자의 사상이 사유의 재료가 될 수는 있다. 에밀 파게는 <단단한 독서>에서 "책 읽는 법이란 약간의 도움을 얻어 생각하는 법을 말한다."라고 했다. 인간은 본래 타인을 흉내 내고 모방하면서 사람이 되므로 세상을 먼저 살았던 사상가에게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따라서 "철학함을 배우는 것과 철학을 배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라고 강신주는 말한다.


 철학함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칸트는 철학함을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음"이라고 정의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삶에서 부닥치는 모순과 부조리, 도저히 인과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정치인이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부정을 저지르면, 우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욕을 하다가 근본적인 의문에 부딪치곤 한다. 권력이 무엇이기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유지하려고 하는 걸까? 권력이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걸까, 아니면 사람이 권력을 더럽게 쓰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답을 찾는 것이 바로 철학함이다.


 이렇게 보면 '철학, 별것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든다. 헤겔의 변증법 따위를 외던 시절에는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이나 하는 학문으로 여겼던 철학이 사실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삶과 밀접해 있는 것이다. 어릴 때는 선생님이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엄마나 아빠가 대신 중요한 결정을 내려주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면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 일상의 사소한 문제부터 사회 전반을 바꿀 수 있는 결정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생각하기를 요하는 일은 끝도 없다. 그러니 무슨 대단히 심오한 고민을 해야만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통용되는 진리들을 모두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나의 생각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고. 마침내 중세시대의 모든 지식들을 해체해서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는 확고한 토대로서의 코기토, 혹은 인간 이성이 바로 이렇게 해서 그 탄생을 알리게 된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거기에 의심이 들 수 있다. 과연 그것이 최선이었는지,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는지. 예컨대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 친환경 제품을 구매해 쓰다가도 '이것도 결국은 쓰레기가 되잖아? 아예 쓰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쓰레기 줄이는 방법들이 인터넷과 책으로 진리처럼 떠돌고 있고 이걸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따라 실천할 수도 있지만, 한 번쯤은 의심을 품어보고 더 나은 방안을 생각해보는 것. 이성이란 궁극적으로 끊임없이 의심하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사상가들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관습을 거부하거나 의심하거나, 하여간 순순히 따르지는 않은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A는 빨간색이다!"라고 주장하면 "정말로 그런가? 파란색이 아니고?"라고 반론하는 사람들. 어찌 보면 짜증 나는 유형의 인간이지만 우리는 그런 기질 덕분에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철학 VS 철학>은 저자 강신주가 선정한 66개의 질문에 관해 상반된 입장을 가진 철학자들의 사상을 약술한 책이다.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130명이 넘는 사상가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니 종이책 기준으로 1295쪽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벽돌만 한 두께가 부담스러우면 전자책을 구매해서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10.3인치 크레마 엑스퍼트로 읽고 있는데, 독서를 시작한 지 84일 지난 지금까지 진도를 35%가량 뺐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은 없다. 활자를 노려보며(?) 낯선 생각들과 씨름하노라면 건강한 긴장감이 뇌를 가득 채워서, 설사 읽고 돌아서서 잊어버려도 뇌근육이 한층 강해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근육도 매일같이 단련하면 탄력이 강화되는 것처럼.



"타자를 자신의 수레로 삼아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것不得已에 의존해서 균형을 기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장자>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철학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신주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은 일반 대중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은 이미 삶에 스며있는 실천'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이걸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오랜 시간을 어렵고 지루하고 딱딱하고 무용한 학문이라고 철학을 오해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이제는 안다. 작게는 일상에서 크게는 자연과 사람과 우주에 이르기까지, 사유하는 것은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철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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