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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Oct 11. 2021

우정편지] 마롱에게 물속깊이가 보내는 네번째 편지


비 소식이 잦은 시월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마롱님.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가 지났는데 이슬이 맺힐 틈도 없이 비가 내리네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시월이라니요. 빗소리는 듣기 좋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마음이에요. 지구가 아프다는 뜻일테니까요. 재작년부터 가을이면 주문해 먹던 감홍 사과를 올해는 먹지 못했어요. 꽃이 필 무렵 냉해를 입어서 사과가 열리지 않았다고 해요. 이제 좀 피워볼까 얼굴을 내밀다가 차가운 날씨에 화들짝 놀랐을 사과꽃을 생각하면 미안합니다. 내리는 비를 보면 따뜻한 카페라떼가 있는 카페나, 그 안에서 읽는 책을 먼저 떠올렸는데 이제는 사과꽃을 떠올려요. 이런 변화가 저를 조금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합니다.


빗소리 안에서 편지 속 마롱님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이 오래 남아서요. 어른이 되지 못하고 어른 역할을 하느라 애썼을 고등학생 생각도 했습니다. 어쩐지 뒷모습이었는데요. 마음만큼의 말은 떠오르지 않아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 슬쩍 서봤어요. 병원에서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꼭 손을 잡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는 걸 그 고등학생은 알고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요 마롱님, 우리는 모두 이미 누군가의 유일한 사람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됩니다.


<오징어 게임> 소문은 익히 들었어요. 보지는 못했답니다. 넷플릭스(특정 명을 써도 되려나 싶지만, 이 편지를 읽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하고 넘어갑니다)에 가입하지 않았거든요. 가입하는 순간 주체하지 못할 저를 잘 알아서요. 가까스로 참아왔는데 편지를 받고 나니 흔들리는 걸요. 어쩌면 조만간 마롱님을 붙잡고 수다를 떨지도 모르겠어요. 오징어 게임은 본 적도 해본 적도 없지만 마롱님이 하나씩 불러오신 놀이는 다 해봤어요. 어린 시절 저는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요(저도 공기를 제일 잘했습니다). 놀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라는 마롱님 물음에 그러게요, 답하다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어요. 서로의 그림자를 밟는 사람들. 윤성희 작가님이 쓰신 <부분들>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장면이에요. “달밤은 우리의 그림자를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그 그림자들이 서로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들은 서로의 가슴을 밟고, 서로의 얼굴을 밟고, 서로의 웃음을 밟았다. 하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림자들이 스치면서 서로를 밟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문장에 오래 마음이 머뭅니다. 아무도 아프지 않은 달밤이라니,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


편지를 마치지 못하고 밤을 보냈어요. 제 편지를 들춰본 건지 오늘은 비가 그쳤습니다. 여전히 구름 가득이지만 먼 하늘에서는 해가 드리우고 있어요. 눈곱만 떼고 새로 산 버킷햇(이라 썼지만 제가 쓰면 어쩐지 산에 가는 어머니 같습니다)을 눌러 쓰고 산책을 나섭니다. 엄마와 가야 할 병원, 처리되지 못한 업무들, 두려운 2차 백신… 속이 시끄러워서요. 어제와 같은 계절인가 싶게 서늘해진 공기에 정신이 번쩍. 늘 걷던 길과 반대로 방향을 잡습니다. 이 동네에서 산 지도 벌써 4년, 뭐 새로울 것 있겠나 싶은 마음을 비웃듯 근사한 카페를 만났어요. 빨간 벽돌에 통창이 있고, 붉은 담 앞에 내놓은 의자가 다정합니다. 마치 카페에 가려고 나온 사람처럼 성큼 가게로 들어섰어요. 오늘부턴 고민 없이 따뜻한 카페라떼입니다. 붉은 담 앞 다정한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열어둔 카페 문으로 먼 곳의 소식처럼 음악이 흘러나오네요. 두서없는 근심들도 음악처럼 흘려듣기로 합니다. 산미가 있는 카페라떼는 투 샷이라 더 맛있어요. 커피 한 잔, 바람 한 점, 가벼운 책, 그리고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까지. 휴일의 시작이 좋습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아침 산책을 시작하려 합니다. 거창한 건 아니에요.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나무 곁을 걷는 게 다니까요. 십 분 정도 되려나요. 고작 그 정도도 내주지 못하고 몇 달을 보냈네요. 대체 뭐가 그리 바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요. 하루씩 짙어질 나무들을 생각하니 출근도 그리 싫지만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휴일이 가는 건 아쉬워요. 마롱님은 휴일을 어찌 보내고 계실까요. 왠지 숲에 계실 것만 같아요. 가을이니까요. 어디서든 부디,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2021년 10월 11일, 물속깊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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