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어떻게..?
<토지> 2부에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 중 '주갑'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가족 없이 홀로 떠돌며 살아온 주갑은 설렁설렁 가벼운 인물인 듯 보이지만, 세상을 대하는 나름의 철학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의 유쾌한 명언 중 하나를 기록해 놓으려고 합니다.
빨래터에서 자신의 옷을 직접 빨고 있는 주갑을 보며 '홍이'라는 아이는 놀라운 듯 말합니다.
"우리 옴마보고 빨아돌라 카믄, 남자가 우찌....."
(엄마 보고 빨아 달라고 하지, 남자가 어째서 빨래를.....)
토지가 품은 문장
<토지> 2부, 6권, 마로니에북스, p.29
"아니여. 남자가 우찌랑이? 그따위 소린 약은 버러지가 허는 말인디
공자왈 선비들 양기가 모자래서 엄살떤 거란 말지."
"양기가 머요?"
"그건 니가 상투 찌르게 되면 저절로 알게 돼"
결혼 직 후, 시부모님께서 방문하시기로 한 주말이었습니다.
부지런히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며 경황없는 동안 예상보다 일찍 두 분이 도착하셨습니다.
벨소리와 함께 시부모님의 빠른 등장에 급 당황한 저는 재빨리 달려 나갔건만 상황은 이미...
남편은 현관 바닥 타일을 닦고 있었던 모양이고, 급히 현관문을 열어젖혔는지,
양손에 빨강 고무장갑을 그대로 낀 채 엉거주춤 서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시아버님의 발언.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나는 왜 그 말이 내 잘못 같았을까요?
거실로 들어오시면서 아버님은 내내 남편이 어떤 스타일로 시댁에서 살아왔었는지 장황한 히스토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면에는 이런 아들이 고무장갑 끼고 야무지게 청소하는 모습이 적절치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같았으면, "왜요? 아버님, 저희는 집 안을 다 같이 하고 살아요~~" 라며 오히려 당연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안절부절못하며 나름 저를 도우려 노력했던 남편에게 원망의 눈총을 날렸더랬습니다.
어르신들 뿐만 아니라 우리 조차도 습관처럼 "남자가 어떻게..."라는 말을 버릇처럼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갑이의 주장에 의하면, "그 때위 소린 약은 버러지가 허는 말"이며,
"양기가 모자라서" 엄살을 떠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양기가 머요?" 아직 어린 홍이는 묻습니다.
양기 : 햇볕의 따뜻한 기운 혹은 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활발한 기운을 말한다. 남성, 빛, 생명, 태양, 낮을 상징 한다.(네이버, 나무위키)
즉, 양기가 모자란 남자들이 "그런 건 남자가 할 일이 못된다"라는 핑계로 엄살을 떠는 것이라니,
참으로 유쾌하면서도 왠지 통쾌해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히 저희 남편은 양기가 모자란 남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살아온 히스토리와는 달리, 빨강 고무장갑도 곧잘 끼고 설거지며 청소도 하고, 생필품 쇼핑도 매우 매우 좋아합니다. 마트에 가면 저보다 더 예리한 매의 눈으로 유용한 생필품들을 골라 비축해 두곤 합니다.
사실 양기이든, 음기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남자라서,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 일이 나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면, 그냥 하면 되는 것이죠!!
새롭게 등장한 주갑이라는 인물과 그의 해학넘치는 말들이 <토지>의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곧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의 언어로 인해 내면의 매력이 돋보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