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행복해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당신

박완서의 말

by 소리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불편하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처럼 약해지면 좋으련만 쌓이고 쌓여 돌처럼 굳어져 버리기도 한다. 오해가 풀려 미운 감정을 접었다 해도 상처처럼 남아 마냥 좋은 관계로 남기는 힘들다.


'내가 왜 이 인간 때문에 감정낭비를 해야 하나?' '돌같이 무거운 감정까지 담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억울해서 그가 더 미워진다.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기는 글렀으나, 최소한 내 감정에 억울함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마음을 털어놓기라도 한 듯 <모래알 만한 진실이라도>라는 책에서 박완서님은 딱 맞는 대답을 들려준다.


박완서의말1.gif <모래알 만한 진실잉라도> 中, 박완서 에세이


믿을 수 없어하는 내 맘까지 어찌 아셨을까?

믿을 수 없다면 꼭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는 당부가 그냥 좋은 말씀, 참고삼아 들어두려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뻘쭘해 진다.




진짜 뻘쭘해진 나는 미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떠올리는 순간부터 마음이 찌릿하고, 깨끗한 종이가 구겨지듯 불쾌해 진다.


좋은 점을 떠올려 보라고?

실눈만 뜬 채 만지기 싫은 물건에 겨우 손을 뻗히는 심정으로 기억을 더듬어 본다.


1.

말과 행동이 너무 달라 그녀의 삶 전체가 뻔뻔스럽게 보이는 그녀.

하지만 우리 아들에게 합격을 축하한다며 손수 만든 펜을 선물했었지. '그걸 직접 만든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전혀 마음에 없는 선물은 아니었을 거야.'


2.

남의 성과를 영악하게 가로채어 자신의 것으로 잘 포장하는, 자신의 똑똑한 이미지를 즐기는 그녀.

쉽지 않았던 내 의견에 적극 찬성하며 하트까지 날려주는 건 그래도 공과 사를 구분하는 사람인거지. 합리적 판단을 한다는 점은 나한테도 필요해.


3.

칭찬하는 말과는 달리 늘 나의 반응을 살피며 뭔가를 캐내려는 눈빛을 보이던 그.

남의 성과까지도 자기 일인냥 칭찬을 아끼지 않는 솔직함은 배울만 했지.



잠시 생각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고 말랑말랑해 지는 것도 같다.


박완서의말2.gif


남의 좋은 점을 보는 것도 훈련처럼 반복하고 노력하다보면 가능해 진다는 것.

이것이 버릇이 되면 그 좋은 점이 확대된다는 것.

그럼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추석 명절, 긴 연휴 덕분에 소원했던 친척들, 지인들의 소식들이 오가면서 그들이 내 마음 속에 어떤 모양새로 자리잡고 있는지를 보게 되는 오늘이다.


책이 전하는 울림을 유난히 하나하나 새겨보는건 그 덕분일까... 서로의 관계에서 상실감도 행복도 느낄 수 있는 우리 인간의 특별한 존재방식이 정말로 신의 한 수라 느껴진다.


우리 안에 "행복해 할 수 있는 조건"들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 미워하는 그(그녀)의 좋은 점을 버릇처럼 찾아 본다. 그 좋은 점이 나에게로 확대되어 행복의 조건으로 딱! 맞아 떨어지면, 정말 기적처럼 그(그녀)로 인해 행복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부자가 되거나 권세를 잡거나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개인의 특별한 능력이듯이 행복해지는 것도 일종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공한 소수의 천부적 재능과는 달리
우리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능력입니다.
창조주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해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춰주셨습니다.
나이 먹어 가면서 그게 눈에 보이고 실감으로 느껴지는데
그게 연륜이고 나잇값인가 봅니다.
- 박완서



♣ 북(Book) 노트

5.png






-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 세계사









keyword
이전 04화똥을 예술로 만드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