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타인인 나
방학 숙제 : 1. 일기 쓰기
2. ....
3. ....
내 일기의 첫 경험은 초등학교 방학 숙제이다.
'나는~ 했다', '그리고 나는 ~ 했다', '그 다음 나는 ~했다'의 무한 반복... (가끔씩 '아빠 혹은 엄마, 동생은 ~했다' 등장) 선생님은 우리 반 애들이 뭘 했는지 왜 죄다 알아야 할까 의문이었지만 일기는 '숙제'였기 때문에 이런 의문은 이내 묻혔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를 잘 기억하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일기.
오늘 하루의 특별했던 한 장면--- 글이든 그럼이든, 사진이든, 시든, 소설이든, 사과 한 알이든, 축구공이든 무엇이든 오늘을 기억할 수 있는 어떤 것이어도 좋았을 것을 말이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의 일기책에는 이런 한 줄도 있다.
1월6일
열심히 번역을 했다.
경험에 의하면 일기는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 중 가장 가성비가 높은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없어도 되고, 쇼핑으로 예쁜 쓰레기들을 사지 않아도 되고, 몸이 부서져라 노동인지, 운동인지 모를 시간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노트와 필기도구만 있으면 되고, 시간도, 장소도 구애받지 않는다. 일기의 치유 효과에는 이런 작용이 있었다.
일기를 쓸 때 나는 내게서 가장 멀어진다.
나는 나에게서 멀어져 타인을 만나고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 <일기시대>, 문보영 -
아픈 감정이 덮쳐올 땐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 때로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도 이겨낼 수 없는 아픔이 있으니까. 압도당하지 않는 방법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일기를 쓰다보면 내 자신에게 점차 멀어져 나를 타인처럼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 있다. 거울에 코를 박을 만큼 가까이 간다고 해서 내 얼굴이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발 더 물러서야 잘 보이는 것처럼.
단, 한가지 규칙만 지키면 된다.
지금 올라오는 감정, 생각을 절대 가감하지 말고, 꾸미지도 말고 쓸 것.
욕이 나오고, 영화에서나 들었을 법한 거침없는 단어, 문장들이 나와도 거리낌없이 그대로 쓴다.
하루, 이틀, 한 주, 한 달이 지나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그렇게 괴롭던 감정에 쓰러져 있는 나를 꼴도 보기 싫고 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다독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일기를 쓰는 동안 나는 상처받아 웅크리고 있는 회색 덩어리같은 나, 혹은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아픈줄 모르고 방치되어 있는 내 모습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서 토닥토닥 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미워하던 나를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다, 마침내는 손을 잡고 일으킨다.
타인으로 나를 만나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 나는 더이상 나를 완전히 미워하는 것은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아, 이제야 알겠다. 선생님이 왜 우리반 애들의 일기를 죄다 읽고 도장을 꾹꾹 찍어 주셨는지...
선생님은 "나는~~ 했다"의 무한 반복으로 이어지는 일기를 읽으며 우리 작은 영혼 속에 깃은 선한 면, 미워할 수 없는 악동들의 선한 마음을 보셨는지도 모르겠다.
<월든>의 작가 소로는 유명한 시인이었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 "요새는 어떻게 지냅니까? 일기는 쓰고 있습니까?"라는 짧은 인사말에 영향을 받아 이 후 평생 일기를 썼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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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태도가 되어 버리는 전조 증상이 느껴질 때, 선을 넘는 감정 폭발, 기어이 나 = 감정이 되어 버릴 때, 그래서 내가 정말 나인 것이 싫어지는 날, 그런 날에도 끄덕없는 나를 위해 일기는 안전지대임가 되어줄 것이다. 한 줄이라도 좋을 나의 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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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요즘 잘 지냅니까?
일기는 쓰고 계신가요?
♣ 북(Book) 노트
*북(Book)소리
- <일기시대> 문보영 에세이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