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세상밖으로,
'비 오는 날엔 도.서.관.이지!'
새벽부터 무섭게 쏟아붓던 빗줄기가 오전, 오후를 지나면서 조금은 약해지는가 싶었을까?
창밖을 왔다 갔다 서성이던 나는 이 생각에 꽤 신이 났다.
비 오는 날 칼국수나 김치전이 당기는 것처럼
비 오는 날 도서관 칩거는 맑은 날에 비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이런 날씨엔 시시때때로 울리는 카톡도, 메시지도 조용하다.
불쑥불쑥 걸려오는 전화도, 분주하게 잡히는 일정도 거의 없다.
모두들 몸을 삼가 실내에 거하거나, 마음을 삼가 자기 속에 머물기 때문이다.
덕분에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통의 날에 도서관을 들어서면 기분 좋은 긴장감과 분주함으로 마음이 설레지만,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의 도서관은 마음을 가라앉힌다.
게다가 지인이 추천해 준 몇 권의 책들, 따뜻한 그림책 또한 만날 수 있는 행운까지 더해졌다.
<아무튼, 메모>
<타샤의 그림정원>
<나는 나의 밤을 떠지 않는다>
단숨에 세 권을 읽었고,
좀 천천히 읽고 싶었던 <어머니를 돌보다>는 대출을 했다.
비 오는 날 도서관 칩거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뜨거운 차의 맛이 배가 된다는 점이다.
늘 마시던 커피가 아니라 홍차의 은은한 향긋함이 풍미를 더한다.
(믿고 마셔 보시길....)
뜨거운 차를 주문하고, 진해진 맛과 향에 탐닉하며,
오늘 만난 문장들을 독서노트에 기록하는 기쁨이란!
도서관 창문 너머로 들리는 빗소리 덕분일까? 마음은 문장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간다.
<아무튼, 메모>, 정혜윤 지음
(p.38)
내 메모장의 여백이 현실보다 더 중요한 현실 같았다.
멋 훗날 나는 보르헤스가 이것을 아주 멋진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p.43)
메모를 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하고 그 미래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p.67)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어떻게 살지 몰라도 쓴 대로 살 수는 있다.
<타샤의 그림정원>, 타샤튜더, 공경희 옮김
(p.24)
나는 이상하게도 별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것들을 사랑하고 싶어 졌기에
모든 계절 중 겨울을 가장 사랑한다.
(p.35)
오늘 우리 마음이 쉴 천국을 구하지 못하면,
천국이 우리에게 올 수 없나니
천국을 안으라.
세상의 우울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우리 손이 닿는 곳에 기쁨이 있나니
기쁨을 안으라.
(p.64)
우리는 행복해야 할 의무를
가장 소홀히 한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 지음, 김선희 옮김
(p.16)
어머니가 돌아가실까 봐 두렵다.
어머니가 세상에 없느니 차라리 미쳐서라도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p.59)
어머니가 곧 나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였던 것이다.
(p.146)
어머니는 가엾은 작은 인형 같았다.
나는 레이스가 달린 하얀 잠옷을 간호사에게 건네주었다.
원하던 대로 마음껏 도서관에서 칩거할 수 있었던 오늘을 감사한다.
돌아오는 길은 마치 다른 세상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이 기분을 떨쳐내고자 했다.
오늘 책에서 읽은 문장의 소리가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도서관 칩거의 시간이 단순한 내 마음의 지적 유희가 되지 않도록,
좋은 것을 내 삶에서 부화해야 한다는 울림.
내 삶에서 성장과 실천으로 열매를 맺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만족감 따위는 의미 없는 유희일뿐이란 생각 때문이다.
숱한 메모들이 저장된 죽은 문장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
감사의 마음을 간직만 말고, 정성스러운 일상으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
치매의 고통 없이 아직도 내 이름만으로도 세상 행복해하시는 엄마, 아빠에게 지금 당장 전화 한 통이라도
드려야 한다는 것.
책을 통해 얻은 귀한 마음이 내 삶에서 부화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책이 나를 살리는 힘이 될 것인가?
어떻게 내가 "그 단어를 살아낼 수 있겠는가"말이다.
오늘 이런 반성과 실천으로 칩거의 시간을 매듭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