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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함은 무능력하다는 증거다

#8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냉철한 인생론


요즘 핫한 철학자는 단연 쇼펜하우어지만, 작년 한 해 동안 핫했던 철학자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이었습니다.


그의 처세술을 소개하는 영상은 보통은 20만 회, 많게는 200 백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처세술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아보고,


왜 사람들이 400여 년 전 한 설교자가 남긴 처세술에 감명을 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냉철한 인생 조언 3가지



발타자르 그라시안(스페인어: Baltasar Gracián y Morales, 1601년 1월 8일 - 1658년 12월 6일)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예수회 신부였는데요.


하지만 의외로 그의 글에서는 종교적인 색채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개인의 성숙을 강조했고 인간의 근본을 지키면서도 실용적인 성공 전략을 갖춰야 한다고 보았죠.


이러한 그의 처세술에 니체는 "이처럼 정교하고 세련된 인생 지침은 이제껏 만나지 못했다"라고 말했고,


쇼펜하우어는 "이 책은 평생 들고 다니며 읽어야 할 인생의 동반자다"라며 극찬했습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 <사람을 얻는 지혜>에는 300개의 인생 조언이 담겨있는데요.


이번 글에 그 모든 내용을 살펴보긴 무리니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은 인생 조언 3가지만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기고 있을 때 행운을 버릴 줄 알라. 멋진 후퇴는 용감한 전진만큼 중요하다. 맛을 즐기려면 어느 정도 달콤 씁쓸해야 한다. 행운은 많이 쌓일수록 미끄러지고 모든 것을 망칠 위험도 커진다.

사람을 얻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김유경 역, 현대지성, 2022, P.64



보통은 일이 잘 안 될 때 그만두는 걸 고려하지만 그는 오히려 일이 잘 될 때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의 말속에는 성공과 실패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운의 영역이 있다는 걸 암시합니다.


이 조언은 투자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되새겨볼 말이겠네요!



빛을 가리는 사람과는 절대 함께하지 말라. 달은 별들 사이에서 홀로 밝게 빛난다. 하지만 해가 뜨면 더는 빛나지 않거나 사라진다. 따라서 빛을 가리는 사람이 아닌, 더 멋지게 빛나게 해주는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

사람을 얻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김유경 역, 현대지성, 2022, P.186



두 번째 조언은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용적인 인사이트를 줍니다.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 자신을 탓하는 걸 멈추고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에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경쟁적인 사람들만 있다면, 환경을 바꿔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에 가보는 선택도 나의 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너무 착한 나머지 나쁜 사람이 되지는 말라. 이런 사람은 절대 화를 낼 줄 모른다. 둔한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늘 무감각이 아닌 무능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사람을 얻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김유경 역, 현대지성, 2022, P.311)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너무 착하다는 건 결국 무능력하다는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평판을 위해서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성숙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하면 좋은 평가는커녕 바보 같다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만만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상황에서 나의 감정을 확실히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적당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이라는 그의 조언은 퍼스널브랜딩 관점에서도 숙고해 볼 만한 말입니다.


예시로 보여드린 3개의 처세술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조언은 400년 전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고리타분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이 살았던 그 시대와 지금 내가 사는 이 시대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요.


지금부터는 그가 이 책을 쓴 배경을 살펴보면서 왜 그의 처세술이 지금 우리에게 실용적인 지혜를 주는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처세술은 왜 '지금' 인기가 많을까?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살았던 17세기 스페인 귀족 사회는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안으로는 속임수와 음모 그리고 배신이 가득했습니다.


궁중에서는 정중한 행동을 강조했지만 상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품위와는 거리가 멀었죠.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그 상류 사회에 깊숙이 침투해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숨은 본모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했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불합리한 세상에서는 정직하면 바보가 된다"라는 냉철한 결론을 내렸죠.


이런 배경에서 그는 삶에서 겪을 수 있는 시련을 미리 내다보면서 냉철하면서도 실용적인 처세술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400여 넌 전 그가 보았던 스페인 상류 사회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고상함 뒤에 도사린 속임수가 17세기 스페인에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노렸다면, 지금은 우리 모두를 노리고 있다는 점이죠.


우리는 진실과 진정성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실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진실로 둔갑한 거짓이 스스로를 진실이라 말하기 바쁘고,


진정성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기가 막힌 플롯으로 짜인 가짜 스토리가 넘쳐납니다.


귄위주의 사회에서 권력과 부는 기득권에 대항한 이들을 광장에서 잔인하게 처형함으로써 공고해집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과 부는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자"라는 평화의 슬로건을 외침으로써 지켜지죠.


겉으로 보기에는 권력의 힘으로 약자들을 찍어 누를 수 있는 권위주의 사회가 더 폭력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체계는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서 전복될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에 반해 평화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는 명분을 가진 시민의 투쟁조차 폭력적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평화와 존중의 슬로건은 듣기에는 좋지만, 투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불평등을 존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이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죠.


이러한 주장을 펼친 철학자가 바로 그 유명한 장 자크 루소였고요.


루소는 자신의 책 <인간불평론기원론>에서 법이 부자들의 교묘한 계획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불평등이 점점 심화하면 타인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는 부를 축적할 방법이 모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결국 폭력과 약탈이 일어납니다.


투쟁의 상황에서는 가진 것은 많지만 힘은 약한 부자보다 잃을 게 없어 목숨 걸고 투쟁하는 가난한 사람이 생존에 더 유리하죠.


부자들은 힘으론 재산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교묘한 술책을 생각해 낸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약한 자들을 억압으로부터 지키고, 야심가를 억눌러 각자에게 속하는 소유를 각자에게 보증하기 위해 단결하자. 정의와 평화의 규칙을 세우자.”
(『인간불평등기원론』, 장 자크 루소, 최석기 역, 동서문화사, 2021. p.109)



불평등이 만연한 상황에서 평화의 규칙을 만들어 서로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다면 결국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불평등은 영원히 좁혀지지 못합니다.


법 제정은 결국 부자들의 재산만을 지키는 결과로 이어질 게 뻔했지만 지금 갖고 있는 소박한 자유만이라도 누리고 싶었던 사람들은 부자들의 교묘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정의와 평화를 기본 원리로 하는 법이 만들어지면서 누구도 타인의 재산을 약탈할 수 없게 되었고, 부자들은 재산을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감에 벗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최초의 사회와 법률은 부자들의 치밀하고 교묘한 술책으로 만들어졌고, 그로부터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불평등이 자리 잡았다고 루소는 말합니다.


지배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인간은 목숨을 건 결투로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말하는 인간은 온갖 권모술수를 이용해 상대를 파멸로 이끕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폭력성과 욕망은 '듣기 좋은 말'로 은밀하게 분출되는 거죠.


우리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동시에 때로는 냉소적으로 보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진실처럼 연출된 거짓인지 알 수 있고, 아름답게 들리는 말들의 속뜻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위선과 위악을 오가는 기우뚱한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상류 사회의 감춰진 모습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내놓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처세술은 우리에게 과거가 아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현재의 텍스트로 다가옵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과

쇼펜하우어라는 경고 신호




최근에는 냉철하고 냉소적인 인생론을 말하는 철학자들이 각광받고 있습니다.


철학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작년에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것도 의외였지만,


예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던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다룬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와 있는 것도 참 놀랍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어쩌면 철학자는 알려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요청되는 존재인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 꿈, 연대를 말하는 철학자가 아닌 불행, 현실, 고독을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건 우리 사회가 그만큼 곪아가고 있다는 경고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소개해 드린 발타자르 그라시안과 함께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 궁금한 분은 아래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는 다음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인간불평등기원론』, 장 자크 루소, 최석기 역, 동서문화사, 2021.

『사람을 얻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김유경 역, 현대지성,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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