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스토랑 Jan 08. 2024

철학을 공부하면 무엇이 남을까?

#10 <현실주의자를 위한 철학> 연재를 마치며


"나도 저 사람처럼 평생 철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


풋내기 대학생에게 야심찬 꿈을 꾸게 해 준 교수님에게 용기 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평생 철학을 공부하셨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결론을 얻으셨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교수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죠.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만 알게 되더군.




기억을 되짚어서 그 말뜻을 지금 다시 헤아려 보자면,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세상을 보는 렌즈를 수집하는 것과 같습니다.


칸트가 본 세계, 니체가 본 세계, 비트겐슈타인이 본 세계, 푸코가 본 세계, 화이트헤드가 본 세계, 로티가 본 세계, 루만이 본 세계, 후설이 본 세계, 장자가 본 세계, 노자가 본 세계, 부처가 본 세계, 혜능이 본 세계, 주희가 본 세계 등등등..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남긴 텍스트로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봤는지 알게 되는 거죠.


만약 이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렌즈가 딱 하나 존재할 수 있다면 공부를 할수록 우리는 정답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진리를 보여주는 '궁극의 제1 렌즈' 같은 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공부를 할수록 이 세상은 더 알쏭달쏭하게 보일 겁니다.


철학자들이 내놓은 이론들의 한계를 발견하는 건 물론이고,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두 이론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도 왕왕 발견하게 되겠죠.


더 나아가 몇 년 전만 해도 세련됐던 이론이 시간이 흘러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철 지난 이론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보게 될 거고요.


이런 맥락에서 교수님은 제게 공부를 할수록 자신이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렌즈를 더 많이 수집하면 할수록 세상이  복잡하게 보이는 건 인지상정이니까요.


10편의 짧은 연재를 마치면저에게 무엇이 남았나 생각해 봤습니다.


이때 교수님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는 건 첫 책을 출간할 때와 같이 이번에도 역시나 어떤 깨달음이나 확신 같은 걸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 저는 철학자들의 눈을 빌려서 복잡한 세상을 조금 더 복잡하게 봤을 뿐이겠지요.


철학을 공부하면서 남는 건 떠밀려 오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는 자각뿐인 것 같습니다.


이 자각이 당최 어디에 쓸모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감각은 다시 저에게 또 다른 지적 탐구의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나면 결국 얻을 게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대책 없는 에너지만 얻는달까요.


"철학을 공부하면 그래도 뭔가 특별한 게 남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 글을 클릭하신 분에겐 조금 어처구니없는 후기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허무한 결말을 알면서도 또다시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건 무엇보다 값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한 챕터의 결론이 아니라 최종 결론에 이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번 연재를 마치고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가 새로운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당탕탕 어설픈 제 지적탐구에 함께해 주신 브런치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

이전 09화 세대 갈등이 필연적인 철학적인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