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처럼 흩어지는 계절
진이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숲 속에 서 있었다.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깊은 침엽수림이었다.
짙은 녹색 나무들이 하늘을 거의 가려버렸고,
그 위에는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푸른 잎사귀 위에 쌓인 눈은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해 이따금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 소리가 괜히 더 크게 들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작은 소리도 마음을 흔든다.
한 발을 내딛자 눈이 무릎까지 푹 꺼졌다.
차가운 감촉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너무 추워 입김이 안개처럼 흩어졌고,
눈앞은 자꾸 흐릿해졌다.
이곳은 분명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장소처럼 느껴졌다.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처럼.
그래서 진이는 걷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자신도 이 숲처럼 굳어버릴 것 같았다.
그때 눈 사이로 빛 하나가 스쳤다.
처음에는 햇빛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용히, 거기 그대로 있었다.
다가가 보니 얼음이었다.
매끄럽고, 지나치게 고요한 표면.
그 안에 흐릿하게 비친 자신의 얼굴.
거울이었다.
아주 맑고, 아주 차가운...
거울 속의 자신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조금 느리거나, 조금 빠르거나.
마치 거울 안쪽에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진이는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닿는 순간, 차가움이 손바닥을 넘어 몸 안으로 번졌다.
빛이 번쩍이고, 발밑의 눈이 무너지는 듯 흔들렸다.
그리고 그다음 기억은 없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방 침대 위였다.
커튼 사이로 아침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천장.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더 이상했다.
침대 옆에는 전신거울이 서 있었다.
진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천천히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망설이다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아주 잠깐 안쪽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놀라서 손을 뺐다.
그 순간, 몸 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아픈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허전했다.
갑자기 가벼워졌는데, 그 가벼움이 기쁘지 않았다.
어깨가 축 내려앉고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다시 손을 대보았다.
이번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거울이었다.
그 평범함이 더 불안했다.
며칠 뒤, 진이는 동료들과 카페에 앉아 있었다.
잔 부딪히는 소리, 낮은 웃음, 평범한 오후...
그 속에 앉아 있으면서도 어딘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때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스치자 몸이 식어버렸다.
심장이 조용해지고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바라보다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진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몸은 다시 따뜻해졌지만 손끝은 오래도록 차가웠다.
이 감각을 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진이는 다시 숲에 있었다.
눈을 헤치며 걷다가 더는 걸을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맑고 차가운 거울이 그녀를 다시 빨아들였다.
눈을 떠보니 작은 오두막 안이었다.
벽난로가 조용히 타고 있었다.
할머니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전 어디에 온 거죠?”
“눈을 떴구나. 넌 지금 네 마음속에 들어와 있단다.”
“설마… 제가 죽은 건 아니죠?”
“아니야. 넌 아직 예쁜 아이란다.”
“제 마음속…”
진이는 한참 말을 못 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싫어요.” 목소리가 낮았다.
“웃는 것도 힘들고, 잘해주는 것도 부담스러워요.
아빠가 다른 여자와 웃는 것도… 싫어요.”
“그래서 제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정말… 모든 게 엉망이에요. 전 왜 이런 걸까요?”
할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진이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추운 계절을 하나씩 품고 산단다. 그 계절이 길어진다고 해서 네가 잘못된 건 아니야.”
“괜찮아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단다. 그저 힘들었다는 걸 네 마음이 알아주면 돼.”
“그러고 싶은데… 잘 안 돼요.”
진이는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장작 타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온기가 천천히 번졌다.
“잘해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할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오늘은 오늘만큼만 견디면 되는 거야.”
눈을 떴을 때 베갯잇이 젖어 있었다.
진이는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조용히 울다가, 숨을 고르다가.
꿈이었는지, 마음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슴 어딘가가 조금은 덜 차가웠다.
아주 조금.
그 정도면,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