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앉자 구름처럼 폭신해 보이는 하얀 헤드셋이 좌석마다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기이하고도 호기심이 드는 이 광경이 생경하게 느껴지면서도 어쩐지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헤드셋을 살짝 들어 올렸습니다. 어떤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헤드셋은 공기처럼 가벼웠는데 막상 귀에 스피커 부분이 닿으니 슬라임처럼 끈적거리기 시작했어요. 귀를 타고 전기가 찌릿 느껴졌고, 이어 들리는 AI 음성 메시지.
“안녕하세요. 눈을 감고 당신이 꿈꾸는 세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장면으로 지금 바로 데려가 줄게요. 마치 현실인 것처럼요. 달콤한 꿈을 선사합니다.”
지금은 야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마침 밤 시간대라 기사님이 버스 내부 불빛을 꺼주셨어요. 동부간선도로를 빠져나가기 전까지, 30분 정도는 조금이나마 눈을 감고 쉴 수 있습니다. 요즘은 버스에 이런 기능도 있네요. 가만 생각해 보니 의자도 소파처럼 푹신푹신해요. 그래요, 마치 영화관 의자 같은데요? 자꾸만 눈이 감겨서 내릴 기력도 없고 버스엔 1000번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으니 에라 모르겠습니다. 그냥 눈 감고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볼까요. 온몸이 나른해요.
거리는 온통 네온사인 불빛으로 가득합니다. 비가 내리고 생긴 도로의 물웅덩이에도 그 불빛이 흐릿하게 번졌고, 사람들이 움직이며 물 위에 파동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저 멀리서 휘파람을 불며 낡은 자전거를 타고 그 거리에 나타난 사람. 눈매가 진하고, 입고 있는 흰색 와이셔츠는 잘 다려져 각이 살아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저였어요! 잠시 자전거를 대고 방문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와플 가게. 생크림 가득 들어가 있는 딸기 와플 하나 시키고 가게 매대에 살짝 기대 땀을 식혀봅니다. 오늘도 정신없이 하루가 흘러갔네요.
두 눈을 감고 꿈꾸는 세계를 상상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어요. 경쾌한 드럼 소리가 들리며 시작된 <몽중인>. 중경삼림의 OST입니다. 맞아요. 왕페이, 양조위, 임청하, 금성무가 다층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그 시절 홍콩 청춘들의 삶. 화려한 도시와 그 도시의 네온사인만큼 빛나는 개개인. 도심을 활보하는 빛들이 때론 뭉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며 서로의 빛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이 빛나는 줄도 모르고요.
노래가 울려 퍼지는 이곳은 홍콩이 아니라 대학로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한 손에 와플을 손에 쥐고 어딘가로 이동 중이네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와플 가게가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이 얇은 와플 반죽 때문인데요. 바삭거리는 식감이 일품이지요. 와플을 입안에 넣자 상큼한 딸기와 부드러운 생크림, 바삭한 빵의 맛이 조화로웠습니다. 이젠 눈 감고도 와플을 만든다며 너스레를 떠는 가게 직원은 서울로 상경한 대학생들 수만 명은 봤다고 해요.
두꺼웠던 와플이 점점 얇아지고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블루베리잼, 바나나, 초콜릿, 망고 등 토핑도 다양해졌는데요. 이렇게 정신없이 단 음식이 잘 팔린다는 뜻은 청춘들이 몰려 있다는 지표가 아닐까 한다고 말을 건넸어요. 뜨끈한 국밥이나 고소한 회나 쓰디쓴 술도 아무렇지 않게 먹으면서도 결국 마지막엔 삶을 가득 채울 달콤함을 찾아 나서는 청춘들. 금성무처럼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먹을 배는 없어서 딸기 와플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추가해서 먹고는 다시 거리를 나섭니다.
여긴 어느 재즈바. 공연 예정이던 밴드가 사정이 생겨서 오늘은 그들 대신 새로운 신예 밴드가 급히 섭외되었다고 합니다. 공연 시간이 되자 무대에 4인조 재즈 밴드가 나왔고, 진행자가 바에 앉은 사람들에게 그룹 소개를 시작했어요. “자, 소개합니다. 그룹 백야.” 그들은 모두 백발의 노년. 보컬, 피아노,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된 그들은 가벼운 재즈 리듬의 노래를 시작으로 2시간을 환호로 가득 채웠어요. 이번에 저는 관객석에 앉아 있어요. 할머니, 엄마도 함께였어요. 할머니는 레몬을 띄운 콜라를, 엄마는 칵테일을 시키고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무대를 바라보고 있어요.
후반부에 다다르며 열기는 더해갔고 여전히 힘이 넘치는 연주에 모두 박수를 보냈습니다. 줄곧 부정적으로 사용되던 열정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어요. 그렇습니다. 우린 지금 멋진 순간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룹 백야가 퇴장하고 <Another Day of Sun>이 조용한 재즈바에 흘러나왔어요. 꿈꾸는 자가 꿈에 바치는 세레나데, 꿈꾸는 자의 열망과 열정이 담긴 노래. 그래서 애달프지만 아름다운 노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이어폰을 끼고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만나면 그들이 지금 듣는 노래가 꼭 재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재즈야말로 노인에게 적합한 장르죠. 인생이라는 단계를 천천히 밟아온 사람들은 그 삶의 리듬을 변형할 줄 알고 가볍게 그루브도 탈 여유가 생긴다고 믿어요. 그런 노인의 여유를 재즈라는 형태로 배우고 싶어요.
영화 라라랜드 속 화려한 색깔의 드레스, 경쾌한 탭댄스로 인상적인 이 노래는 훗날 노인이 될 제가 동네 친구들과 현재진행형의 꿈을 이야기할 때 다시 듣고 싶어요. 꿈속이라 벌써 그룹 백야의 얼굴이 흐릿해졌어요. 그래도 그들의 길고, 짧고, 파마한 하얀 머리카락만은 또렷하게 기억할 것 같아요.
붉은 노을이네요. 그가 노을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는 제 눈동자를 보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제가 선글라스를 낀 탓에 우리가 눈빛을 교환할 일은 없었습니다. 페도라를 쓴 채 잠시 붉은 노을을 바라보다가 비행기를 다시 타고 하늘 위로 향했습니다. 부둣가에 모여 있던 갈매기도 비행기 이륙과 동시에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에 올라타 거울을 살폈습니다. 뾰족하게 나온 두 귀, 뭉툭한 코, 선홍빛의 피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노을이 존재하는 시간에만 붉은 돼지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요. 이 생활이 익숙해진 탓인지 사람으로 변한 짧은 순간에는 오히려 혼자가 되고 싶습니다.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요. 사람이 되면 얼굴 근육을 잘 활용해서 편안함을 연기해야 하죠. 그럴 바엔 지금처럼 아무도 내 표정을 들여다봐도 어떤 생각하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 지금이 좋죠.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니 거울이 무언가 말을 쏟아내려고 해요. 그러나 어떤 감정도 지금은 마주하기 두려워요. 비행기에 타며 이마 위에 올려뒀던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합니다. 거울 속 나와 눈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요. 괜히 만지작거린 라디오에선 붉은 돼지 OST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들을 보니 탁 트인 하늘과 하늘을 가르는 낭만적인 돼지가 떠올랐어요. 물론 돼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붉은 돼지의 고독함, 상처받은 듯하면서도 따듯한 내면, 가을 느낌을 물씬 풍기는 분위기를 닮고 싶었어요.
붉은 돼지는 왜 고독할까요? 달콤한 와플이 있는 미드나잇 와플 가게에 들르고, 백발이 되어도 여전히 꿈꾸는 사람들이 있는 재즈 바에도 다녀왔지만요. 결말은 붉은 돼지가 되어 비행기를 타고 홀로 이동하는 일이라니 인생은 알 수 없어요. 그래도 붉은 돼지는 고독할지언정 하늘에서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기에 나쁜 결말은 아닙니다.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잠시나마 달콤하셨나요?
당신이 그린 장면들은 종종 꿈속으로 배달됩니다.
그러니 부디 상상하기를 잊지 마세요.”
욕망은 여러 형태로 돌고 돌아요. 제가 꿈꾸는 세계도 이렇게 다양하고요. 이런 감정들이 혼재된 채 사는 게 인간다운 것 같아요. 야근하고 힘이 쭉 빠진 줄 알았는데, 꿈꾸고 욕망하고 소망할 힘도 더는 남아 있을 리 없다고 슬퍼했는데 착각이었나 봐요. 이렇게 다채롭다니.
꿈꾸는 세계, 제가 사랑한 영화들의 OST를 들으며 집 근처 정류장으로 도착했습니다. 정차 벨을 누르고 가방을 메고 버스에서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 말고 다른 승객들도 모두 헤드셋을 끼고 눈을 감고 있네요.
그들의 얼굴은 편해 보였으며, 모두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포근히 귀를 감싸주던 헤드셋을 벗으니 이제 노래가 흘러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버스에 내리고 집으로 걸어가며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이 OST가 나왔던 영화의 제목은 <바그다드 카페>
“하지만 우리는 알아요. 변화가 다가온다는 걸. 달콤한 해방이 다가오네요.”
변화를 가져다주는 바그다드 카페를 만나기 위해 이번 주말엔 아주 푹 자고 싶어요. 어떤 종류든지 꿈을 꾸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선 일단 꿈부터 꿔야 해요. 단잠을 자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