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갈 길 가는 사람들. 핸드폰을 보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푹 떨군 사람들. 한 정류장 이동할수록 혼잡해지고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아침 시간대의 차가운 공기. 아침이 되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마피아는 서로를 잠시 살펴봐 주세요, 누군가 외쳐도 어느 한 명 눈 깜빡하지 않을 버스 풍경.
어쩌다 같은 시간대 버스에 탑승해서 잠깐 보고 말 사이인 우리. 그런 우리가 기묘하게도 전에 없이 다정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서로의 머리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 때. 아침 출근 시간이나, 저녁 퇴근 시간.
감은 눈. 비스듬히 어딘가에 기댄 머리. 정처 없이 흔들리는 몸. 버스의 움직임에 자신을 오롯이 맡기고 방황하는 누군가에게, 어깨를 빌려준 경험 있나요.
빌린다는 말은 어색해요. 빌리다의 숨은 뜻은 언젠가 갚아야 한다는 말이고, 그러기 위해선 신원 파악을 위한 통성명부터가 우선이기에. 게다가 우리가 빌려주는 것은 다름 아닌 어깨입니다. 민감한 얼굴과도 가까이 붙어 있고 잠깐 떼줄 수도 없어요. 빌려주는 이와 빌리는 이는 오늘 버스 왼쪽 두 번째 줄, 창문과 복도 좌석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물론 이렇게 소중한 어깨를 빌려주기 위해서 마음을 나누거나 이야기한 적도 없습니다.
어깨를 빌리는 모든 경우에서 우리의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피치 못 하게 피곤하고 졸려서 내가 졸고 있는지 버스에 앉아 있는지도 분간이 안 가는 상황. 그러다 정차 벨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는데 낯선 이의 어깨에 머리가 살짝 걸쳐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죠. 이런 일이 아니고서야 남의 어깨 빌리기는 상상할 수 없어요.
사실 빌리기보다 빌려주기가 더 어렵습니다. 빌려주는 상황이 찾아오면 눈을 질끈 감습니다. 아아, 저기 동물의 신경계를 통합하는 최고의 중추를 감싼 작고 동그란 머리가 들썩들썩합니다. 좌우로 흔들려요. 점점 다가옵니다. 이제 진짜 근거리 진입. 피할 것인가, 빌려줄 것인가. 선택해야 해요.
제 어깨를 스쳐 지나간 사람 중 얼굴이 기억나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어깨를 빌려준 경험이 극히 적었음에도 말입니다. 그저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움직임만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죠. 어떤 날엔 눈을 떴더니 저와 옆 좌석 사람 모두 비몽사몽이어서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어요. 다행스럽게도 제가 먼저 눈을 떠서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민망함에 버스에서 내릴 생각만 하면서요.
보통은 만화에서 자주 쓰이는 ‘스윽’ 효과음처럼 슬쩍 다른 자리로 피하거나, 다른 대안이 없으면 헛기침하며 곤란함에서 벗어나고자 하죠. 그런 와중에 교복 입고, 무거운 가방 메고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안경이 떨어질 정도로 헤드뱅잉 하는 예비 록스타 꿈나무들을 내치기는 어렵습니다. ‘스윽’ 효과음을 다시 꺼내며, 작고 동그란 머리를 위해 어깨를 내어줍니다. 아직 어깨에 침 묻힌 사람을 만나진 않아서 다행이죠.
때론 피했고, 빌려주기도 하며 어깨를 주고받았습니다. 제 어깨에 기댄 머리, 제가 빌린 어깨를 떠올립니다. 빌려줄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순간에서 때때로 빌려주는 것을 택하는 이유는 저 역시 빌린 적 있기 때문이겠죠.
저도 모르는 순간, 누군가의 어깨에 동그랗고 까만 짐 하나 얹어줬음이 때론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마우면서도 창피하기도 합니다. 아마 평생의 시간에서 어깨를 빌려준 이에게 똑같이 어깨로 갚는 날은 찾아오기 힘들겠죠. 말했듯이 아쉽게도 애초에 어깨를 빌린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럴 땐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호의만큼 다른 누군가에게 어깨 갚아야겠다, 생각했고 가끔 빌려줄 용기도 낼 수 있었죠. 많고 많은 인구 중에서 저처럼 어깨를 빌린 어깨 부채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우선 어깨가 축 처졌으니 쫙 펴주세요. 기지개도 한번 해주시고요. 지금처럼 핸드폰만 들여다보면 거북목이 되어 어깨에도 영향이 간다는 사실. 틈틈이 사무실 의자에서 일어나서 좌우로 허리도 돌려주시고 어깨도 주물러주셔야 해요. 왼쪽 오른쪽 어깨의 균형도 늘 신경 써주세요. 지금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졌어요.
어깨에 크고 작은 짐 한가득 얹고 삽니다. 꼭 동그란 머리 아니더라도 여러 고민, 스트레스로 인해 무거워진 어깨가 콕콕 쑤셔 와요. 언젠가 갚게 될 어깨를 위해 스트레칭을 잊지 않기로 해요. 준비운동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