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피크 시간엔 교통체증으로 인해서 이럴 바에 걸어가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버스가 움찔움찔 움직입니다. 겨울잠을 끝내고 부지런해진 해가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기에 직장인의 아침도 더 빨라진 것 같아요.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부터 도로가 막히지만, 더 빨리 기상할 재간이 없어 운명을 예감한 채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차 있는 좌석을 보며 오늘도 빨리 가긴 글렀군, 하며 제가 부지런해질 수는 없으니 일찍 일어난 부지런한 사람들을 괜히 원망했어요.
차창 밖의 풍경은 슬로우비디오로 촬영한 듯 느리게 움직였습니다. 버스 창틀을 프레임 삼아봅니다. 사각 프레임으로 세상 밖을 구경해 봅니다. 감독이라면 어디를 클로즈업할까요?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독자도 매력적으로 느낄까요? 어떤 장면과 장면을 이어 붙여야 극적인 효과가 생기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는지 고심해 봅니다.
지난밤엔 대교의 파란 불빛이 일렁이는 한강을 풀 숏으로 담았습니다. 두두거리며 빠르게 대교 아래로 향하는 작은 배를 다음 씬으로 보여줬어요. 배가 사라질 때까지 풍경을 찍지 않고 대신 물결의 파동을 찍었습니다. 빠르게 지나간 배는 메아리를 계속 남기고 있었어요.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물 위에서 직선의 거친 움직임을 상쇄하기 위한 물결의 분주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퇴근길 버스는 세상을 아주 느린 시간으로 지나가게 해서 그 시간 속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메아리가 언제 끝나는지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었어요.
시선을 아래로 두니 여러 종류의 쓰레기를 도로 곳곳에서 발견했습니다. 노트를 펼치고 오른손엔 볼펜을 쥐고 볼펜 끝부분을 살짝 물어뜯었습니다. 나른해진 상태로 천천히 세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트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 도로 주변에 자꾸 보였습니다.
회색 도로 양옆엔 심어둔 꽃들과 심지 않아도 잘 자라는 풀들. 인공물과 자연물 사이에 생필품들이 보이는데 왜 너희 여기 있니. 그 물건의 쓸모를 다 한 형태로, 그러니까 뚜껑이 개봉되고 내용물이 없는 포카리스웨트, 누군가 차에서 피고 버렸을 담배꽁초, 코를 푼 걸까? 두루마리 휴지 조각, 반듯하게 딱지로 접혀있는 꼬깔콘, 햇빛에 반짝거려 그렇게 보이면 안 되는데 살짝 아름답게 보이는 담뱃갑.
제품으로서 가치가 끝난 물건 중 특이한 녀석이 도로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갑. 풀숲 사이에 목장갑, 빨간 장갑, 검은 장갑이 울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포카리 담배꽁초 목장갑, 두루마리 휴지, 빨간 장갑, 담배꽁초, 담배꽁초, 검은 장갑. 이런 식으로 물건들이 계속 발견되는 겁니다.
서울 간선도로에서 계속해서 발견되는 장갑 미스터리. 슬로우비디오로 세상 보기의 소재를 잡아본다면 장갑을 주인공으로 발탁해야 해요. 무서운 건 잘 못 보지만 이런 미스터리에는 공포 장르가 적합합니다.
A는 이 도로에서 풀을 다듬고 꽃을 가꾸는 60대 현장 노동자입니다. 그는 계절별로 있던 꽃을 뽑고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꽃을 심어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풀 뽑고 흙을 다듬기 위해선 반드시 장갑이 필요해요. 고속도로에 가기 전 오른쪽에는 목장갑을, 왼쪽 호주머니에는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를 잘 챙깁니다. 매연을 마셔가며 그는 5월에 만개해 있는 색색의 튤립을 도로 옆에 심습니다. 흙을 잘 덮어주기 위해 오른쪽 주머니를 더듬어가며 목장갑을 찾는데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요. 겸사겸사 쓰레기를 주워 담기 위해 가져온 비닐봉지를 보니 담아둔 쓰레기들이 모두 커다란 구멍으로 숭숭 빠져나갔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문득 정신을 차려보았을 땐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거뭇하게 타 버린 한 사람이 지글거리는 고속도로 위에 놓여 있습니다. 따가운 햇빛 속에 그의 정신도 같이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는 그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도 모르고 자꾸만 이곳저곳에서 장갑들을 모아서 도로 곳곳에 가져다 놓습니다. 더는 꽃을 심지 않아도 괜찮은 겨울이 될 때까지 목장갑은 도로 곳곳에 쌓일 겁니다. 아무도 그게 이상하다고 눈치를 채지 못하겠지만요.
어떤 이질적인 존재는 그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합니다. 프레임은 사각 틀. 사각 틀 너머의 세상이 모두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각 틀 바깥에서 우리는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어떤 이야기에 집중할지 선택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작은 사각 틀을 통해 슬로우비디오로 바라본 세상이 지금 내 앞에 있고 서늘한 이야기를 하나 떠올려봤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나가 풍경이 바뀌며 또 지나갔는데 정작 제가 이 버스를 내려서 바라볼, 그리게 될 이야기는 아직 상상조차도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슬로우비디오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일까요. 버스에 내려서 도착한 세계에서는 1.2배속으로 살짝 빠르게 걸어야만 하죠. 종종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사각 틀보다 더 넓은 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