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달밤의 질주

by 북극성 문학일기

콧속으로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가득 들어옵니다. 손잡이를 잡은 두 손이 시리기 시작하고 머리카락은 바람 따라 자유롭게 흩날립니다. 하천의 비릿한 물 냄새를 맡으며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달밤의 질주 중입니다. 자 하나, 둘, 셋 이제 손을 놓고-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하늘엔 우수수 별이 쏟아지는 곳. 숨 가쁘게 내달리고 있는 이곳은 어느 해변 도로입니다. 생의 어느 날에 분명 와봤을 텐데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알 수 없이 벅차오르는 마음을 보니 역시나 이 장소, 분명 와 봤습니다. 순간이동의 제1의 원칙은 반드시 이전에 와본 곳이라는 점.


파도 소리가 크게 들리고 주위에 많지는 않지만 삼삼오오 사람들이 해변을 따라 걷거나 뛰고 있습니다. 도착할 장소엔 크고 작은 오차범위가 존재합니다. 하천의 비릿한 물 냄새를 맡으며 어느 바닷가와 빨간 등대를 떠올렸는데 아쉽게도 등대 앞에 바로 도착하진 못했습니다. 저 멀리 희뿌옇지만 강한 불빛 하나가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저곳이 원래 생각했던 목적지겠지요. 저곳까지 뛰어가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탁 트인 하늘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거칠게 얼굴을 스치는 이 감각이 그리웠습니다. 겁낼 것 없이 막 뛰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바로 들려 좋았고 다시 숨을 고르게 내쉬기 위해 호흡하며 차분해지는 순간은 줄곧 꼭 바라던 일이었습니다. 끈적한 땀이 나며 그간 가지고 있던 걱정이나 불안의 찌꺼기도 같이 빠져나갔기에 제가 감당해야 하는 건 오롯이 제 몸의 무게만이었습니다. 발걸음은 가벼워졌고 늘 무겁게 들고 다닌 가방의 무게는 생각나지 않았죠.


등대가 또렷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부턴 주위도 둘러보고 걸으면서 별도 보고 가볍게 스트레칭도 했습니다. 돌담에 발을 올려서 신발 끈도 묶고, 두고 온 친구와 가족도 떠올렸어요. 바닷가에는 가수가 아니더라도 자유롭게 기타 치는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으니 하는 수 없죠. 제가 흥얼거리는 수밖에는 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만큼 바닷가와 잘 어울리는 노래는 또 많겠지만 오늘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려고 합니다. ‘오늘 같은 날’에서 ‘정말 없었는지’로, ‘별거 아니라고’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다가 끝으로는 ‘오늘 같은 날’로 다시 마무리해 봅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오늘 같은 날 이렇게 뛰고 걷고 바다 내음 맡고 싶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큰 세상에서 제가 작고 별거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때때로 겪어요.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정말 없었는지 물어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 살아있기에 행복한 일들도 많았다고 답하겠지만요. 그렇지만 오늘 같은 날. 바람에 폭 안기고 싶을 때가 찾아오니까요. 막막하니까요. 모든 게 두렵게 느껴지는 때가 오니까요.


등대에 도착했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저 빨간 등대를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상징이겠죠. 사랑이 하트 모양인 것처럼,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처럼 저 빨간 등대도 상징이겠습니다. 생을 잘 견디고 싶다. 여기서 다짐해 봅니다. 밤안개 껴 희뿌연 불빛만이 돌아가는 이 등대 아래서.


순간이동으로는 가보지 못한 곳을 갈 수는 없습니다.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곳을 가볼 수는 없습니다. 오롯이 만지고 느끼고 경험하고 본 곳에만 도착해요. 미래에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어지면 지금처럼 겁내지 않고 올 수 있는 빨간 등대 같은 상징을 이곳저곳에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등대를 한번 껴안아 주고 왔습니다. 서늘함이 팔에 훅 끼쳤고 오소소 소름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등대에 혀끝을 대었다면 분명 짭짤한 바다맛이 났을 거예요. 사람 대여섯 명이 빙 둘러야 안을 수 있을 등대는 넓고 듬직했으며, 이곳에 온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도 아량 넓은 마음으로 우리의 무탈을 기원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등대 아래에서 다시 눈을 감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상상했습니다. “이번 정류장은 oo 아파트입니다.” 눈을 떠보니 버스 안이더군요. 집과 한 정류장 거리인 정류장이었고 곧이어 정차 벨을 눌렀습니다. 삐- 소리와 희뿌연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달밤의 질주가 무색하게 정류장은 참 고요합니다. 쿵쾅쿵쾅 뛰던 심장도 평온했고 바닷바람과 내음도 더는 나지 않습니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별은 없지만 나무 위에 매미 소리가 한가득입니다. 나무 근처로 다가가 이번엔 나무도 한번 안아주었습니다.


한낮의 뜨거움이 저장되었는지 나무의 온도는 밤에도 살짝 따듯하기도 하고 미지근합니다. 모두 다 서늘함과 미지근함 사이에서 이렇게 견디고 사는 거겠죠. 문득 베란다에 둔 수박이 떠올랐습니다. 냉장고에 두지 않아 지금 먹는다고 하면 밍밍한 온도겠지만 그래도 다디달겠죠. 사각사각 수박을 먹으며, 오늘은 푹 자고 다가올 내일을 위해 힘을 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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