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토마토
여름이기 때문일까. 기운이 없고 자꾸만 축 처지는 이유를 여름에게 돌리고 싶다. 나는 무더위에 정신 못 차리고 하마처럼 물을 연거푸 마시고, 일 끝나면 돌아와 바로 샤워하고 소파에 온몸을 맡긴다. 지금 내 머리를 떠도는 기억이 나를 떠나서 영영 사라지면 좋겠다. 그 기억이 혼자 토마토 축제에서 놀다가 얼룩덜룩해진 몸을 씻고 싶어서 파도 속으로 돌진했으면 한다.
바다는 말미잘, 누군가 잃어버린 슬리퍼 한 짝, 오리 모양 튜브, 알루미늄 캔과 반짝거리는 과자 봉지를 해수면 위에 둥둥 띄운다. 기억의 몸에 붙은 토마토 껍질은 그것들과는 달리 천천히 가라앉기를 바란다. 마침내 기억이 머리를 털고, 따가운 햇빛으로 인해 그을린 몸을 일으켜 다시 물 밖으로 나올 때. 그땐 두고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몸에 붙은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다 잊은 채로 반짝이는 풍경만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 기억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면, 나는 늘어져 있던 몸을 다시 일으키고 녹색이 가득한 나무 사이를 걷고 싶다. 푸른 잎이 있고 거기서 숨을 길게 내뱉는다. 숨쉬기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새로운 숨을 들이마시기 위해선 머금고 있던 숨을 뱉어야만 한다. 애써 내뱉어본다. 간단한 일도 간단하게 느껴지지 않는 어느 여름 저녁.
토마토는 상큼하고 시큼하고 달다. 토마토는 과일도 아니면서 사과나 앵두, 복숭아보다 붉다. 작년 겨울, 토마토를 보고 채소가 아닌 과일인 줄 알았다. 나의 토마토는 사과나 앵두, 복숭아보다 더 과일 같았다. 눈깔사탕의 빨간 색소처럼 인위적인 붉은색을 보고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로 무슨 맛일지만 궁금했다.
빨강보다 더 빨간 토마토를 깨물어 먹자 슈팅스타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안에 있는 자잘한 토마토 씨가 팝핑 캔디처럼 톡톡 터지며 입안에서 불꽃 축제를 시작했다. 갑자기 쏘아 올려진 폭죽으로 심장이 울렁거리고 빠르게 뛰었다. 달콤하기만 할 것 같던 토마토는 색깔만 붉었고, 실은 익지 않았다. 천천히 맛을 음미해보기도 전에 떫은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뱉어야 할까 망설였는데 다 삼키지도 못한 채 우물거리며 형체가 사라질 때까지 씹고만 있었다.
첫 토마토였다. 길을 걸을 땐 늘 기웃거리면서 구석구석 작게 맺힌 산딸기도 먹어보고, 붉진 않더라도 주렁주렁 매달린 채 향기 가득한 포도도 먹어보고, 알알이 박힌 석류도 먹어보라고 주변인들은 하나 같이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마음에 콕 박히진 않았다. 나는 운동화 끈 열심히 묶고, 선크림 잔뜩 바르고 펄럭이는 깃발 하나 들고 열심히 깃발 꽂을 곳을 찾는 모험가에 가까웠다.
걷고 걷고 걷는데, 날은 아직도 땡볕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목도 계속 말라서 지쳐가는데 그때 발견한 첫 토마토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토마토는 어때, 나 멋쟁이 토마토지? 뽐내지 않았다. 깃발 꽂을 수 있는 흙 한 줌도 없는 온통 회색 콘트리트 바닥을 걷고 걷고 걸을 무렵 발견한 토마토였기에 토마토에게 눈길이 계속 갔다.
내가 토마토의 존재를 궁금해하자 토마토도 나를 궁금해했다. 토마토는 자기를 궁금해한 사람이 처음이라고 했다. 나 역시 궁금해진 토마토가 처음이었다. 토마토는 자기는 과일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의 빛깔은 과일 같다고, 과일이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우리는 토마토가 과일일 가능성을 두고 대화 나눴다.
토마토는 처음에는 과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며 맛만 좋으면 되지 그냥 먹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망설였다. 토마토가 과일이 아니라면 먹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토마토는 자신이 채소가 아닌 과일일 수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했다.
토마토를 만나는 동안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거리가 색채라곤 없는 회색 콘크리트뿐인 사실을 잊었다. 매번 딱딱한 땅을 걷는 감각에만 집중해서 집에 오면 늘 발을 마사지하느라 온 신경을 다 쏟았는데, 이상하게도 토마토를 만나면 토마토밖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빛깔의 토마토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온몸이 긴장되고, 제때 숨 쉬지 못해서 숨이 가빴다. 목소리는 자꾸만 낮아지고 몸은 자꾸만 웅크려졌다.
그건 토마토의 잘못은 아니었다. 토마토는 토마토일 뿐이었고 나는 나일 뿐이었다. 나와 너무 다른 토마토와 있으면 자꾸만 나는 납작해졌다. 토마토는 나와 있는 순간, 무엇보다도 붉고 아름답고 상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토마토 앞에서 여행길 내내 들고 다닌 깃발을 펼쳐서 보여주고, 깃발뿐만 아니라 흙을 밟아 축축해진 신발도 보여주고 싶었다.
신발은 축축해지고 군데군데 흙도 묻었지만, 나의 자부심이었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와중 토마토가 이걸 받아 들여줄지 의심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진심을 숨겼다. 숨긴 것은 신발만은 아니었다. 토마토 네가 과일이었으면 해! 네가 과일이 아닐까 봐 늘 전전긍긍한 하루를 보낸다고, 만약 과일이 아니더라도 과일이길 원해. 칭얼거리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지만 숨겼다. 나의 진심을 알면 토마토가 화들짝 놀라 성큼성큼 멀어질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토마토가 여전히 좋았다. 토마토가 좋은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뛰는 심장! 토마토를 본 첫 순간을 기억하며, 심장을 믿었다. 믿을 건 심장뿐이었다. 그렇지만 뛰는 심장만큼 솔직하게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토마토는 마침내 말했다. 자기는 아무래도 과일이 아닌 것 같다고. 빠르게 뛰던 심장은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 조금 더 너그럽게, 조금 더 여유를 갖고 토마토가 과일일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도왔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나는 심장 탓을 했다.
애초에 심장이 아니었더라면 토마토를 발견하지도 못했을 텐데,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모든 걸 조급하게 망쳐버렸다고 자책했다. 그렇게 토마토와 멀어졌다.
나는 여전히 회색 콘크리트 위에 서 있다. 달라질 건 없었다. 평소처럼 날마다 길을 걸으며 토마토를 생각했다. 깃발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었기에 다시 깃발을 꺼내서 이리저리 휘두르고 힘도 내려고 했지만 아무런 힘도 나지 않았다. 망할 회색 콘크리트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에너지가 없었다.
토마토는 과일인 적 없다고 말했고, 나도 토마토를 떠올리며 내 마음을 의심했었다. 과일이길 바란 내 마음마저 진짜가 아니라면 이 시간은 다 의미가 없어지겠지. 토마토를 떠난 뒤 다시 생각해보더라도 나에겐 토마토는 과일이었다. 혹여 토마토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거나 자기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해도 그건 상관없다.
나에겐 토마토는 어떤 것보다 붉었으니까. 그걸 한입에 먹고 싶어서 발 동동 구르던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다. 그때 토마토를 먹지 않았더라면 시름시름 앓았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모든 것이 으레 그렇듯 그때의 성숙하지 못한 나를 바라보는 현재의 내가 후회할 뿐.
내가 그랬듯이 토마토도 많이 배웠을까. 마침내 토마토를 과일로 이끌어줄 사람이 부럽다. 그것에 나의 심장과 시간이 크게 한몫했으리라고 믿는다.
크게 배우고 크게 상처받고 크게 아파서 그런지 요즘은 토마토를 떠올리기만 해도 시큼하고 심장이 콕콕 아프기만 하다. 기운 없는 몸을 좋아하는 음식으로 달래고 한없이 걷고, 글도 계속 쓰고, 무엇보다 잠을 많이 자고 있다. 아침에 눈 뜨면 바로 떠오르는 토마토에게 이젠 말도 걸 수 없다. 토마토의 붉은빛이 자는 내내 어른거리지 않고, 온통 녹색으로 덮어버리고 싶은 여름밤이다. 가득 녹색으로 덮어버리고 나면 또 어느새 어른어른 붉은빛이 비치리라고 믿는다.
퐁당- 바닷속에 푹 빠진 채 짠맛 쓴맛 다 느끼던 여름에서 벗어나 파도가 다시 세상 끝으로 돌아가는 썰물의 계절. 그 계절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