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쌍화차

by 북극성 문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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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쌍화차

쌍화차 먹는 계절이 따로 있지 않지만 부쩍 쌀쌀한 가을이 오면 전통 찻집을 가고 싶어진다. 요즘은 프랜차이즈 카페에도 쌀알 동동 띄워진 식혜나 계피 향 진하게 나는 수정과, 유자차 대추차 생강차와 같은 전통차를 많이 판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늘 먹는 코코아나 카페인 없는 캐모마일 허브티를 주로 마시는데, 영혼을 뜨끈하게 하고 싶을 때 전통차 메뉴를 기웃거린다.


따듯함 아니고 뜨끈함. 입사 초반만 하더라도 걸핏하면 국밥을 찾는 동료들과는 거리를 두고, 회사 근처 여러 곳을 방문해보겠다며 주에 한 번은 새로운 음식점을 가곤 했다. 요즘은 뜨끈한 음식만을 찾아다니며 가던 곳만 죽어라 파고 있다. 대구탕, 순대국밥, 닭곰탕, 콩나물국밥. 국밥 순회공연 한참 하다가 덩달아 슬며시 생각나는 쌍화차.


검다 못해 새까만 쌍화차. 오미자차나 매실차처럼 색깔이 확연히 보여서 안에 재료가 무엇이 들어갔는지 바로 아는 차와 달리, 쌍화차의 새까만 모습으로는 건강한 재료는 다 들어갔겠지 추측만 가능하다. 계피, 감초를 비롯해 백작약, 당귀 등이 들어갔다는데 맛으로 구분하긴 어렵다. 가끔 동동 뜬 말린 대추, 잣, 호두만 질깃 씹어먹으며 고소함을 느낄 따름이다.


자잘한 견과류를 씹어먹으며 살짝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한 쌍화차를 들이마신다. 요즘 몸이 축 처진다. 번데기 주름 잡는다고 주변 인생 선배들은 한마디씩 하겠지만 몸에 기운이 없다. 일일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 자고 씻고 하는 일만으로도 벅찬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눈 떠보니 눈 펑펑 내리다가 새싹 돋았다가 벚꽃 지고, 비 쏟아지더니 가을이 왔다.


새해 매번 똑같은 다짐. 운동해야지. 취미 생활도 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하루하루 나를 채워갈 거야. 주먹 불끈 쥐지만 상반기 다 끝나가고 어느덧 가을쯤 오면 꽉 쥐던 주먹의 힘도 풀리기 마련이다. 아래로 시선을 내려 주먹을 보니 어느새 100원짜리 동전만 한 공간이 생겼다. 그 사이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드나들고 멀어진 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메울 순 없기에 속이라도 뜨끈해져야지 마음이 좀 낫다.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겠다는 다짐 대신 태어난 이래로 정해져 있다는 사주팔자가 궁금해지고, 한의원에도 가서 뜸도 뜨고 침도 맞는다. 월급 받은 김에 한약 FLEX도 해본다. 한 첩에 음료 두 번 먹을 가격을 주고서라도 건강을 쟁취하겠다는 어느 직장인. 살아보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한의사 할아버지는 말씀하시며, 내 배에 10개도 넘는 가는 침을 놓는다. 느슨해진 내 주먹을 보며 손을 펴보라고 하시더니 손바닥 정중앙에도 침을 꽂는다.


처방받아 먹은 한약의 탁한 황갈색보다 쌍화탕 색깔이 더 진하지만 향은 둘 다 진하다. 한약을 계속 달여 마시기엔 금액이 상당하니, 편의점에도 있는 쌍화차에 애정이 갈 수밖에 없다. 나는 대추 쌍화차보단 모과 쌍화차가 더 좋다. 노랑 라벨이 산뜻하다. 쌍화차의 구수함에 산뜻함이 어울리나 싶지만 그래도 조금 더 청춘인 기분.


꽉 찬 보름달처럼 기운이 다 차오르면 좋겠지만 매일 한가위 같지도 않고 기운은 또 있다가도 없는 법. 쌍화차로 마음을 천천히 데운다. 감기 걸린 동료 손에도 하나 쥐여주고, 우리 집에도 한 상자 쟁여두고, 친구 생일 선물로도 보낸다. 작년은 비타민, 올해는 쌍화차, 내년에도 건강식품 선물하는 쪽으로. 마음의 양식인 책을 보내던 때는 지났다. 책 선물은 어른이 되어 취향이 올곧게 생긴 본인이 직접 고르기로 하자.


따듯함도 아니고 뜨끈함을 쟁취하고자 분투하는 어른이 됐다. 전통 찻집에 들러 쌍화차 아닌 계란 동동 띄운 쌍화탕을 시킬 여유로운 주말. 그렇게 평온할 주말을 보내기 위해 시집 한 권 챙기고 집을 나서는 부지런함은 어쩌다 가끔 작동한다. 일상 속 뜨끈함을 책임져주는 수십 개의 쌍화차가 모여서 그 힘을 낼 수 있다. 파워레인저도 한 명만 있으면 세계를 구할 수 없듯, 국밥과 한약과 침, 뜸, 수십 개의 쌍화차가 모여서 일상을 유지하게 하고 조금 더 나아가게 하는 법.


건강, 건강, 건강 찬가를 하게 되고야 만 직장인이 되어 요즘은 버스를 타도 잠만 푹 자다가 겨우 눈 뜨더라도 사실은 힘을 비축하고 있다고. 다시 흐물해진 주먹 한번 꽉 쥐어본다. 덤벼라, 세상아! 아니 되도록 덤비지 말아줘. 웬만하면 그냥 나쁜 건 피하게 해줘. 지금 너에게 깡 부딪히면 주먹 아작 날 것 같아. 나는 주먹 쥐고는 있지만 되도록 피해 보려고 하는데 도와주라. 주먹을 스쳐 지나가는 가을바람에 읍소하며 뜨끈함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가을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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