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너무 늦었으니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동네에서 그쪽보다 오래 살아 밤길 훤히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자신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보낸 것이니 안전하게 집으로 가는 골목까지만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그와 집으로 가는 밤거리를 같이 걸었다. 하지만 우리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번화가를 지나 한강을 걷고, 대학교 주변을 걷고도 걸음이 부족해서 집 근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서로 마주 보지 않은 채,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삐걱삐걱 그네의 움직임을, 나의 두근거림을 내비쳤다.
그도 나와 같이 앞 뒤로 움직이며 박자를 맞춰 주었다. 귀뚜라미가 울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새벽은 조금 쌀쌀했지만, 춥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방황하고 있었고, 입술은 낙엽보다도 더 생기가 없었다. 그 분위기에 취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며 그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그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말할 수 없음을,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 달랐고 취향도 책임감도 같이 함께할 수 없었기에 그 시간이 더욱 소중했고 할 수만 있다면 신의 모래시계를 멈추고 싶었다.
그의 눈은 점점 감기기 시작했고, 나의 욕심 때문에 더 이상 그를 잡아둘 수 없었다. 결국 입술 언저리까지 걸친 단어는 끝끝내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고, 그도 그의 길을 걸어갔다. 혹여 그가 나의 뒷모습을 지켜볼까 뒤돌아 보지 못했다. 그 날은 어떤 이도 잠들 수 없는 울음찬 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날 우리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시작은 해보지도 못하고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하지 못했다. 지금 이 마음이 오래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까? 두 사람의 마음이 합이 맞지 않아 깨질까 두려웠을까? 우리 둘의 모습이 타인에게 보여지는 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게 두려웠을까?
우리에게 부족한 건 바로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와 믿음이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었고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단정지었다. 이미 그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우리 관계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100%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관계를 이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얘기다. 하물며 가족들과도 의견다툼이 일어나는데,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날 때 아무일도 일어 나지 않는다면 과연 연애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헤어짐을 알고 있었다면 후회가 아니라 추억으로 그 사람을 남겨야 했다.
그 이후로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었고, 가끔 그와 걸었던 길을 걸을 때면 자연스럽게 그 날이 떠올랐다. 한참을 돌아 얘깃거리 가득했던 놀이터에 도착했다. 빈 그네가 유난히 더 쓸쓸해 보였다. 우리가 머물렀던 새벽녘 놀이터는 너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