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끝내기 위해

세계평화는 용사에게 맡기고 평민은 자기계발하러 떠납니다.

by 녹차파우더

하나부터 열 까지 익숙하지 않다. 매우 서툴다. 매번 시작할 때마다 겁을 내고 일어나지도 않은 실패에 몸을 사린다. 언젠가 맞이할 호통과 잔소리, 주위 사람들의 악의 없는 평가와 댓글에 움츠러든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튀지도 못나지도 않은 적당한 그림자가 되어 나를 발견하지 않기를 바란 날이 수두룩하다.


어느새 숨는 게 일상이 되었다. 중간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눈만 마주쳐도 시선은 '휙' 하고 금세 찰과상을 남긴다. 뻗어나간 물음표가 생채기를 덧나게 하고 엉뚱하게 결말로 매듭지어 흉터를 남기고서야 눈물로 상처를 뒤덮는다.


드러내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머리만 숨기고 누군가 숨은 나를 발견해 주기를 원했다. 아무에게도 관심은 주지 않으면서도 나에게만 애정을 쏟아주기를 바랐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부담감은 우리 사이를 항상 갈라놓았다. 놓친 관계가 지나간 날이 지속될수록 즐거운 기억도 잔상으로 남아 기어코 흠집을 낸다.


이제 스스로 안아주는 것도 지쳤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하는지 알아도 나만 알아선 무엇도 될 수 없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도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하염없이 바깥만 바라봐서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사실만 남는다.


체험판으로만 즐긴 취미는 뭘 해도 재미가 없다. 데모버전 이후의 공략집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구입해도 스스로 즐기지 못한 게임은 공주를 구해도 마왕을 무찔러도 아쉬움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데 나이만 먹은 사람이 되었다.


과거가 부끄러워 포맷하여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도 전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사양은 여전한데 무의식적으로 나를 망가뜨리는 일이 습관처럼 변질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도전, 시작이란 단어는 희망에 가까우면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면 유해한 중독이 되기도 한다. 결말이 없는 시작이 두렵다. 어중간하게 실패한 나를 만나게 될까 봐, 타인의 시선에 움츠러들까 봐, 포기라는 몹쓸 병이 또 도질까 봐,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리가 될까 봐, 시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렵다.



자의식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가 원하지 않은 일들이 반복되는 상황들을 적어보았다. 피폐한 사건은 드라마와 소설에서만 일어나기를 바랐는데, 지금 이대로 간다면 선택지를 정할 경황도 없이 그대로 배드엔딩이 될게 뻔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도 뭐 하나 열심히 해보지 않은 탓으로 어둡기 만한 얘기일 게 분명하다.


아, 싫다. 열쇠는 내가 쥐고 있는데, 그런 뻔한 결말이라니. 여태 내가 살아온 경험치로는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없다. 손으로 쓰고 몸을 움직이고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본다. 할 수밖에, 익숙지 않고 끝까지 가보지 못한 일을 내 손으로 끝내는 수밖에 없다. 달라지지 않을 결말이라도 죽어서 핑곗거리는 남겨두고 싶다.


과거로부터 질질 끌어온 미련과 후회에 새 데이터로 시작할 수 없다. 퀘스트는 여전히 남아있다. 마왕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는 일이 아닌, 내가 행복하기 위해 스토리를 바꾼다. 무자본으로 시작하는 초보자는 치트키 없이 퀘스트목록을 확인한다. 이번 모험은 어디까지 깰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일지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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