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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Apr 02. 2021

저면관수

워킹맘 다이어리

"선생님, 제가 요즘 너무 일을 벌리고 살거든요. 정신 차려보면 또 일을 벌리고 있는거에요."


글쓰기반 선생님에게 고민상담을 했다. 내 고민을 가만히 듣던 선생님은 "혼자 다 하려고 하지마요. 다 안 되더라도 그려려니해요." 그래, 내가 너무 혼자하려고 했어. 내가 너무 다 되려고 했구나.  머리로는 백번 천번 다짐한 일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수업을 마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북토크로 향했다. 그곳에서 직장 선배를 만났다. "어머, 서영씨!"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색은 안 했지만 부끄러웠다. 페이스북에 내가 쓴 글들을 공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주말 북토크에서까지 글을 쓰는 나름의 고충을 토로하는 모습은 딱히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옆에 직장 선배를 신경쓰다가 하고 싶은 말을 멈추기에는 이 북토크에 나오기 위해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북 토크에 참가비를 낸 것이 아까웠다. 주변 사람들은, 회사 일에 육아에도 모자른 체력을 이것저것 저지르고 다니는데 에너지를 쓰고 있는 나를 보며 지인들은 적잖이 걱정한다.


오늘은 원래 건강검진일이었다. 병원 가기 30분 전, 소변을 참고 있다가 남편에게 임신이면 어쩌지? 물었다. 남편은 둘째 아니라고, 임신 아니라고 했다. 모르는 소리! 우리 딸도 관계 일주일 후에 임신 테스트기를 했을 때 명확한 한 줄이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두줄이 나왔단 말이다. 자기 몸 아니라고 저렇게 무책임하게 말을 해도 된단 말인가. 엄밀히 내 자궁 속에 생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나저나 오늘 회사에 공가를 쓰고 나왔는데 회사를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건강검진을 한 주 미루고 남편에게 회사 출근한다고 말하고 밖을 나섰다. 걷다보니 따뜻한 햇볕 탓에 한 5분쯤 걸었나. 그냥 회사 가지 말자는 마음이 섰다. 호수공원에 가서 김밥을 먹으며 벚꽃을 구경했다. 오늘 출근했으면 정말 억울할 뻔 했네.

김밥을 먹으며 지난 주말 북토크에서 들은 책 목록을 정리하다가 문득 지금이야말로 또 뭔가를 저질로도 되겠다는 이상한 다짐이 섰다. 그러니까 나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다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더 저질러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카톡이 왔다. 과장님의 문자였다.


"저번에 말한 그거, 언제 실행하실거에요?"


지금이다! 나는 채팅방 하나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맨 처음 거론했던 내 고민. 벌리고 다니는 일이 무엇이냐면 틈만 나면 책을 내자고 하고, 틈만 나면 우리 어서 글을 쓰자고 한다. 그 중에 일환으로 우리 부서에서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뭐라도 만들면 어떠냐는 제안을 사기꾼처럼 떠벌리며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모았다. 딱히 뭘 할지는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일단 채팅방을 만들었다. 이 채팅방을 뭐라고 부르지. 공동체일까, 동아리일까, 동호회일까, 소모임일까.


"이건 영업비밀인데요. 화분에다 물을 주는게 아니라 화분 받침에 물을 주는거에요. 사실 화분에 물을 주면 뿌리 깊은 곳엔 닿지 않거든요. 그런데 화분 받침에 물을 주면 깊은 뿌리가 물을 먹는거고, 식물이 먹고 싶은 만큼 물을 마시는거에요. 그렇다고 먹는대로 주면 과습이에요. 적당히 화분받침에 물을 주세요."


이같은 물주는 방식을 저면관수라고 부른다고 했다. 며칠 전 과장님의 베란다 식물이야기를 내 글감으로 쓴 날, 점심 산책을 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과장님에게 브런치에 글을 연재 중이고 이번엔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동화책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 그림을 시작했다는 말을 전했다. 동생과 엄마와 채팅방을 열어 매일 서로가 쓰는 글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너무 여과 없이 내 사생활을 떠벌렸다. 그 이야기들이 과장님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아니면 그 날 벚꽃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이 과장님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장님은 자신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글쓰기, 독서 공동체. 그렇게 소모임을 시작하게 됐다. 쓰고 싶은 만큼만 쓰고, 읽고 싶은 만큼만 읽는다. 그냥 아무 것도 안 해도 이 모임에서 공유되는 글과 책을 본다. 느낀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만든 이 공동체가 저면관수가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 같은 베란다 정원에 사는 식물들에게는 화분에 맞는 물주기 방식이라는게 있는 것이다. 내 분수를 알고 나에게 맞는 자유를 찾고 실행하는 것. 사람들이 이리저리 머리를 싸매 살 궁리를 찾는 와중에 저면관수라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야 말로 내게 맞는 현명한 생존전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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