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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May 06. 2021

살아야지 별 수 있나

야마자키 나오코라 저, <햇볕이 아깝잖아요>(샘터,2019)

정원은 분명 기다려주겠지. (221쪽.)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으며 야마자키 나오코라가  마지막 문장을 쓰며 어떤 표정일지를 상상했다. (※마지막 문장이 보고 싶으신 분들은 위를 드래그해보세요. ) 고요하고 조촐한 베란다 정원. 작가 야마자키 나오코라는 싹이  당근이나 썩기 직전의  같은 쓰레기 더미를 보며 눈이 반짝였다. 글을 쓴다고 주접을 떠는  모습과 흡사 비슷했다. 야마자키 나오코라, 사람 식물에 진심이다. <햇볕이 아깝잖아요> 식물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식물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식물스러움을 이야기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글을 발표할 수 없었던 시기에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나는 베란다 테이블이나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그저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멀리 솟은 철탑과 푸릇한 식물들을. 나는 베란다에서 흙 속의 작은 싹을 찾으며 나이를 먹어갔다. 고독이나 지루함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98쪽.)  


베란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 세상이 정의 내리는 답 대신 꽃, 열매, 새싹에 다른 의미들을 정의 내리기도 하는 것이다. 배 속의 아이를 잃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다시 아이가 태어나도, 하던 일이 실패해도 꽃은 피는. 내 타이밍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자연에게 야마자키 나오코라는 큰 안도감을 느낀다 했다.


식물을 씨앗부터 키워본 사람만이 아는 감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도 그런 감각을 갖고 싶어 주말농장을 신청했다. 텃밭 신청을 하고 한 달째 주말마다 비 온다는 핑계로 가지 않다가 어린이날 어딜 가든 사람이 많을 것 같아 떠밀리듯 텃밭에 갔다. 역시나 텃밭엔 아무도 없었고, 내 텃밭만 덩그러니 맨 밭이었다. 서로에 폐 끼치지 않을 만큼 간격을 두고 심다 보니 밭이 모자랐다. 밭 옆구리에 파를 멋없게 심어버렸다. 나는 어딜 가도 참 멋이 없구나! 그래도 뿌듯했다. 파 모종과 방울토마토 모종은 작은 모종 화분에서 살살 꺼내 흙 사이사이로 할머니 머리카락처럼 잡히는 연한 실뿌리들을 손바닥으로 안아 조심스럽게 흙 속에 옮겨 심었다.


심어 놓고 캐러 오기만 하면 된다는 고구마를 가장 많이 심었고, 키우기 쉽다는 파도 한 팩 심고, 아이와 함께 따고 싶다는 상상으로 산 방울토마토 모종도 한 팩 심었다. 잡초가 나지 않게 검은 비닐로 흙 위를 둘렀다. 검은 비닐 위를 삽으로 무심하게 한번 찌른 뒤 고구마 줄기를 심었다. 이렇게 대충 심어도 자라서 고구마가 된다고? 남편과 나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신발을 털고 텃밭을 나왔다.



싹이 트고 나서야 비로소 생이 시작되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뭘까? 어떤 것을 살아있다고 봐야 할까? 수분을 머금고, 숨을 쉬고, 활동을 멈추지 않은 상태일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생물도 있을 터라 딱히 정의 내리기 어렵다. 물기 없이 말라 있거나 호흡하지 않거나 휴먼 상태로 죽은 것처럼 보이는 생물도 있지 않은가. (...) 솎음질의 괴로운 점은 제초와 달리 솎아내는 풀과 살아남는 풀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같은 종이니까. '어째서 이 싹은 솎아내고 저 싹은 남길까.' 솎음질을 하면서 자문자답한다. 생존율을 높여야 하니 약해 보이는 것을 골라 솎아낸다. 다른 싹에 비해 크고 튼튼한 싹을 남기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짚어보면 작았던 모종이 나중에 크게 자라기도 한다. (117~119쪽)


퇴근길 마트에 들렀다. 텃밭에 들른 이후로 마트에서 보는 식물이며, 밖에 핀 풀잎들에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나는 주로 퇴근길 마트에서 아침에 갈아 마실 과일, 아이 간식, 싼값에 세일하는 고기들을 산다. 오늘은 사과 한 팩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사과 여섯 알에 사천 원. 내가 이 마트를 즐겨 찾는 이유다. 팔지 못 할 다 상해 가는 것을 판다. 오늘도 팔지 못 할 것들을 잔뜩 사들고 남편과 아이를 먹이러 집으로 향한다.


금방 상할 거 같은 것부터 깎는다. 사과 껍질이 노인 피부처럼 질기다. 무심결에 사과를 늙은 사과라고 부른다. 정작 사과는 늙은 게 아닌데.  팔리지 않아 늙어 보이는. 나무에서 딴지 오래된 사과. 썩기 일보 직전의 사과는 아주 달다. 진짜 썩어버렸는데도 가끔은 아까워 갈아 마신다. 갈아버리면 썩었는지 안 썩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꿀맛이다. 썩어가는 것들이 이렇게 감쪽같은데.


혼자 중얼거리다가 부엌 식탁 앞에 간이 의자를 놓고, 주말에 마시다 랩으로 입구를 막아 둔 맥주캔을 식탁 위에 꺼내 놓고, 블루투스 키보드를 두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글 쓰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아이 돌보고 집안일하다 또 글 쓰다 잠들고 출근하고. 내 삶은 뒤집힐 것도 없이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식물에게는 잎과 뿌리, 입이 두 개라고 하는데. 나한텐 글과 입, 입이 두 개다. 그렇게 그냥 사는 거지. 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돈은 둘째치고 내가 쓰는 글들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데, 한 가지 취미 정도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자괴감에 빠졌다.(...) 쓰는 일을 중단하고 가까운 라면집에 갔다. (...) 라면 한 그릇을 비우니 다시 기운이 났다. 맛있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암담했던 나의 미래도 괜찮게 느껴졌다. 배가 고파서 우울했졌던 것이었을까. 어쨌든 앞으로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화초를 돌보고, 밭을 일구고, 산책하며 살아가야지. 별 수 있나. (196~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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