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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Jul 16. 2021

여자가 하기 좋은 일

워킹맘 다이어리

스커트 지퍼를 살짝 내리며 외쳤다. "사장님! 여기 맥주 하나요.철판 위 대패삼겹살이 흰 김을 내며 빠르게 녹아 육즙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오늘 출강은 어땠어?" 남편이 물었다. "덕분에 잘 했지."  2센치 정도 거품이 생긴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쭉 들이켰다. 아, 이 맛에 일하지!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이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 내 커리어를 뽐내고, 오랫동안 발표준비를 하는 자리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술 기운 때문인지, 오랜 시간 참아온 알 수 없는 감정들때문인지 별안간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는 왜 육아시간 안 써?"  뱉어놓고 아차싶었다. 이 감정은 서운한 감정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이게 최선이라는걸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유지해오던 우리의 일상이었는데. 오늘은 출장 강의를 하러 나가는 바람에 남편이 조퇴해서 아이 하원을 맡았다. 나는 그리고 남편은 남편의 커리어를 걱정하고 있었다. 남편은 나보다 경력이 많지 않으니까. 더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커리어를 끌어올려야 하니까. 지금 우리의 최선은 이것이라고. 그러나 계속 감정의 모서리에 먼지 같은 서운한 마음들이 콕콕 박히고 있었다. 이 모든 우리의 최선의 전제조건에는, 언제든 최서영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 일을 멈출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 광역버스 안 비상망치 같은 존재라는 걸. 


계산대 앞에 섰다. 그 사이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먼저 밖을 나가 있었다. 가게 사장님은 유리창밖으로 보이는 남편의 모습을 보시더니 "아빠가 아이를 아주 잘 보네요. 엄마가 편하겠어"라고 말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유독 후덥지근 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 와중에도 출강을 나간다고 정리하지 못 한 업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최근에 마무리를 짓지 못 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업무 중에 하나는 '성별영향평가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현재 내게 성별영향평가서는 마음의 짐이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처음 맡아본 신규사업이기도 했고, 이번 주 있었던 컨설팅 상담 내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우리팀 말고도 50여개나 되는 많은 부서들의 작년 성별영향평가서를 훑어보다가 가장 많이 쓴 표현과 아이템을 짜집기해서 평가서 초안을 들고 갔었다. 컨설팅에는 지역의 여성민우회 대표님이 앉아계셨다. 나는 대표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 


"이건 어떤 근거로 작성하신거죠?" 

대표님이 내게 물었다. 

"아, 그건....."

"담당자님 생각이신가요?" 


어떤 사업이건 마찬가지이겠지만 근거자료 없이 담당자 개인의 생각으로 공문을 작성하는 일은 없어야 했는데, 온갖 짜집기를 하다보니 이 보고서는 담당자 개인의 사유도 아니고, 그렇다고 근거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도 아닌 엉망진창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컨설팅 피드백이 메일함에 도착해 있었다. 피드백의 내용은 내가 작성한 초안과는 정반대의 논조를 품고 있었다. 이 피드백을 참고하여 다시 작성한 내가 쓴 성별영향평가서 일부는 아래와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남성은 ‘임금 근로 형태’, 여성은 ‘비정형, 시간제 일자리 형태’의 근무체계를 선호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으며, 같은 시기에 입직을 하여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여성은 임신·출산·육아를 하게 되어 임금 근로 형태의 업무에 부적합하다고 역할규정 하는 경향이 있음. 

   -  여성가족부가 주관 2020년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평균 가구원 수는 2.3명, 1인 가구는 2015년에 대비 30.4%증가하였고, 부부와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가구의 비중은 31.7%로 감소하였음. 과반수 이상의 20대가 비혼(53%), 무자녀(52.5%)에 동의하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향후 가족 형태와 생애주기에 급격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됨.

   -  본 사업에서는 특히 이러한 성별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을 개선하고 공존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문화를 확산하는데 주안점을 둘 필요가 있음. 참여자들의 성비 균형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성평등 홍보물을 생산 할 수 있도록 ‘성인지 역량강화’를 본 사업의 개선안으로 세울 계획.

   -  본 사업의 특성상 비고용 형태의 경제활동 참가라는 한계가 있지만,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개인의 실질적인 경력과 연결 된 역량 강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본 사업의 목표로 설정함. 





근본 없는 공문은 쓰지 말자! 고개를 저리저리하면서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갔다. 내 머릿속은 편견과 관념으로 가득찼구나. 그 어디에도 여성이 비고용형태의 경제활동을 선호한다는 근거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존재하지않는다. 여성은 어떠어떠하다라는 '그냥 그런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편견과 관념들이 도처에 존재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 편견과 관념은 정말로 여성을 비고용형태의 경제활동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비상망치 취급하고 있던 것이다. 

요즘 여가부 폐지를 두고 정치권과 메스컴이 뜨겁다. 여가부의 작동에 대한 논조보다도 나는 '폐지'라는 말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진다. 일을 잘 못하고, 일을 잘못하면 언제든 '폐지'를 염두할 수 있는 방식 말이다. TV토론을 보다가 직장어린이집을 만든 것이 여가부인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오히려 이런 건전한 토론이 정책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좋은 장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집으로 돌아와 스커트 지퍼를 쭉 아래로 내리니 말 그대로 숨통이 탁 트였다. '에이, 괜히 멋져보일라고 안 어울리는 옷을 입었어! 성별영향평가서...... . 나는 샤워를 하고 이불을 덮으면서도 성별영향평가서를 머릿속으로 타이핑을 치고 있었다. 다른 부서 평가서도 그렇게 다 고쳐주셨겠지? 아, 2021년 성별영향평가서 종합 문서를 빨리 열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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