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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Jul 28. 2021

퇴근 당하는 엄마, 야근하는 엄마

워킹맘 다이어리

몇 달 전, 부부싸움의 종전을 선언하며 했던 남편과의 약속이 있다. 소리 지르지 않기, 물건 던지지 않기. 차라리 밖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남편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강령이었다. 약속을 하는 순간 조차도, '어떻게 평생을 소리 안 지르고 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맞은 편에 앉아있는 남편 표정도 '어떻게 평생 안 싸우고 살 수 있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그 약속을 응당 선언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나고, 어느 평범한 월요일 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과시간인데도 내 속은 점점 끓고 있었다. 야근을 한다던 남편이 밤 11시가 되어서도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으휴, 미련한 사람.' 대한민국 직장인 남성 중에 야근을 안 하는 사람이 몇 이나 있겠냐마는, 어떻게 12시가 되어서 들어온단 말인가. '누구는 일이 없어 야근을 안 하나?'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오후 5시가 되면 어김 없이 나는 퇴근 당한다. 오후 5시까지 오늘 해야하는 할당량을 마무리하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건 오히려 워킹맘인 나란 말이다. 


해가 지고 나가본 적이 언제였던가. 

해진 밤풍경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12시까지 야근을 해대는 남편을 둘러싼 이 상황과 

우리 가정을 이 지경까지 내몬 회사 경영 상황, 

더불어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없는 사람 취급 당하며, 

'육아 당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내 상황까지 

모든게 불협화음이었다. 


'C발! D새끼들! J같아, C발!' 


아이가 놀랄까봐 소리도 내지 못 하고 허공에다 대고 욕 하는 이 상황이 더 화가 나 주저 앉아 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분하고 억울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베개를 샌드백 삼아 치다가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실 육아가 너무 힘들 때면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워킹맘이 겪는 틱장애 같은 것이랄까. 아이가 잠을 자지 않겠다고 아빠를 찾으며 울 때, 아이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기저귀 가져와!" 화가 나 아이에게 질렀다던 그 마저도 돌봄노동이라니. 아이가 놀래 자기가 여기저기 벗어놓았던 기저귀들을 가슴에 한아름 품고 왔다. 그 모습이 귀여웠지만 귀여움 보다는 노여움이 앞섰다. "누워!" 아이는 이런 내가 낯설다는 얼굴을 하다가 눈을 비비고 잠이 들었다. 


지난 주말, 남편에게 그래도 야근은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남편이 야근을 해서 화가 났다기 보다는 딱 11시까지가 내가 아내로서,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할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이었던 것 같다. 아니, 모든 사람의 에너지 총량이 다 그렇지 않을까? 아침에 눈 뜨고 밤에 눈을 감기 직전까지 일만 하다 끝나는 하루. 그런데 남편도 딱히 나와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건 저녁 한 두시간에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는거 뿐이다. 

이렇게 숨통이 막히는 평일 때문에 나는 기어코 주말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 하던 두 시간짜리 글쓰기 수업에 3시간짜리 장자 수업을 추가했다.



야근 하느라 조금 늦는다던 남편은 12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수고했어, 고생했어와 같은 그런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야근을 한건 나도 매 한가지이기 때문에, 오늘은 그 말 한 마디를 남편이 해주길 원하는 상황이었다. 역시나 인사 조차 하지 않는 내 앞에 나타나 남편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 끝을 흐리며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억울한 마음에 불쑥 커진 목소리로, 

"나도 힘들었거든?" 

이라고 말했다. 


내 말 한 마디로 서로가 지키려던 강령들은 무너지고 냉전이 시작됐다. 우리 사이에 격차는 줄어들기는 하는걸까. 서로 노력한다고 노력하는데 그 간극은 좀 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오늘 글에는 사랑과 이해를 부르는 결론 따위는 없다. 그저 다 큰 어른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다가 부은 얼굴로 다음 날 출근을 했다는 후문만을 남긴 채, 남편이 언제 또 야근 할지 막막함에 휩싸여 이 터널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남편과 내가 그렇게 평행선으로 서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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