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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Feb 07. 2022

펜으로 그린 프러포즈 반지

워킹맘 다이어리

페이스북을 보다가 프러포즈 반지 주고 파혼당한 썰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200만 원 상당에 프러포즈 반지를 받고도 파혼을 하게 생겼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 사람들.... 내가 어떤 프러포즈를 받았는지 알면 놀라 까무러치겠는데.


얼마 전에도 한 동생이 언니는 프러포즈 어떻게 받았냐고 물어보길래 말해줬다가 한참을 웃었다. 남편이 내게 한 프러포즈는 보편성과 독창성을 동시에 가졌다.


말하는 나도 웃겼지만 내 앞에서 웃는 동생 얼굴을 보니 괜히 남편을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도 그땐 눈물이 찔끔 나올 거같이 감동적이었어!" 정말이었다.


2016년 11월 11일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10월 어느 날. 눈치를 주지 않으면 어쩐지 프러포즈를 안 하고 넘어갈 거 같았던 남편에게 나는 적어도 혼인신고일 전에는 프러포즈를 해야 한다고 엄포를 주었다. 급하게 준비한 나머지 발등이 뜨거웠던 남편은 프러포즈 전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내게 실수로 자신이 몰래 준비한 프러포즈를 스포일러 했다. 호텔 어쩌고 하는데 대충 눈치를 챘지만 그냥 못 알아들은 척했다.


2016년 11월 10일, 프러포즈하는 사람도 프러포즈받는 사람도 모두가 프러포즈를 할 것임을 알던 그날, 역시나 남편은 갑자기 호텔 라운지 바에 가자는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된다.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이 갑자기 호텔 라운지 바라니. 칵테일을 한 잔 마신 후 갑자기 호텔 옥상에 올라가 전경을 구경하자던 남편은 뜬금없이 호텔 6층에 내렸고, 호텔방에 데리고 갔다. 천장에 달린 분홍색 풍선. 결혼해달라는 이야기가 담긴 스케치북. 분홍색 반지 케이스. 여기까지는 너무나 뻔하고 촌스럽기 그지없는데, 이미 내 눈엔 눈물이 고일락 말락 한다. 돈도 없는 사람이 반지까지 준비했구나 싶어 반지 상자를 열었더니 엥? 뜬금없이 토끼 모양 브로치가 들어있었고, 남편은 내 손가락 위에 네임펜으로 하트 모양 반지를 그려주었다.

프러포즈 반지에 실망은커녕, 그렇게 짠돌이인 사람이 이 호텔 예약하면서 얼마나 손이 떨렸을까 싶었고 오히려 대견하다 못해 호텔비가 너무 아까웠다.


"이 호텔 숙박비가 얼마야?"

"20만 원"

"20만 원?"


괜히 프러포즈해달라고 했나. 살짝 후회가 들기도 했다. 짠돌이 남편에 짠순이 아내. 그렇게 우리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구청 앞에서 설렁탕 한 그릇씩을 먹고 혼인신고를 하며 부부가 되었다. 왼손 약지에는 희미하게 하트 반지 그림이 그려진 채로.


여보는 나 못 만났으면 결혼을 못 했고, 나는 여보 못 만났으면 이혼했겠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러고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굉장히 높은 확률로 그러고 살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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