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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Aug 12. 2022

여름휴가

워킹맘 다이어리

휴가 다냐왔냐는 말이 안부인 여름이다.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축축 처져서 오늘은 특별한 일도 없는데 반차를 냈다. 오랜만에 네일숍에 가서 네일아트도 받고 마사지샵에 가서 피부관리도 받을 예정이다.

 

행신역에 갔다. 마사지 예약한 시간보다 일찍 가서 행신역 주변 상가들을 둘러봤다. 그렇게 비가 쏟아졌는데. 몰라보게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것이 ‘무색하다’는 말이 떠오르는 날씨다. 엊그제는 폭우가 엄청 쏟아져 서울 강남이 잠겼다고 한다. 80년 만의 기록적 폭우라고 한다. 반지하가 이제는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정말로 그 많은 집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지게 될까.


네일아트 받고 얼굴에 마사지 받고 나니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조금 넘어버렸다. 버스 안에서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 근무시간 일 텐데. 요즘 회사에서 신경 쓸 일이 많은 남편은 어김없이 전화기 너머로 걱정거리들을 늘어놓는다.


어린이집에 도착하고 나니 평소 하원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어졌다. 제 몸집만 한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아이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왼쪽 어깨 쪽으로 머리를 숙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힘드냐, 배고프냐, 덥냐 묻는데 아이는 고개를 거칠게 젓더니 "엄마가 늦게 와서"라고 말한다. 시계도 숫자도 모르는 게 엄마 늦게 온 거는 어찌 알고.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다이너소어 송이라는 공룡 노래다. 다이너-소어. 다이너와 소어 사이에 음이 모호하게 내려가는 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아이가 그 노래가 흥얼거릴 때 나는 주말 아침 울리는 알람 소리처럼 여유를 각성한다. 아이의 까딱거리는 고개와 다이너-소어라는 뭉갠 발음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아이에게 오늘 받은 네일아트를 자랑한다. 손톱 색깔과 비슷한 바탕에 오른손 검지와 왼손 약지 손톱 위에 하트 파츠다. 하트 파츠는 열을 받으면 붉어지는 특별함을 가진 파츠여서 자랑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비가 와서 바닥에 물 자국이 난 곳을 가리키며 "아니야! 이게 하트잖아"라고 말한다. 그러네, 진짜 하트모양이다.


아이는 그냥 걸어가는 법이 없다. 항상 아이의 시선은 땅바닥 아래에 있거나 가야 할 길이 아닌 곳에 가 있다. 그런 아이를 억지로 끌고 김밥집에 갔다. 언제는 차리고 싶었냐만은 오늘은 정말 밥 차리기 싫은 날이다. 김밥 안에 햄만 빼먹는 아이 때문에 김밥집을 나갈 때는 사장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놀이터에서 한바탕 실컷 놀고 편의점에서 장바구니에 먹고 싶은 과자를 실컷 담고 집으로 온 아이는 갑자기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잠이 든 아이를 뒤로 하고 이제야 침대에 누워 쉬려고 하는데 오늘 늦는다는 남편이 일찍 들어왔다. 까만 봉지에 잔뜩 막걸리와 술안주를 들고 들어온다. 무언가 또 속상한 일이 생겼구나 직감한다. 남편 맞은편에 앉아 한참을 하소연을 듣는다.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또 어쩔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속상하다. 그게 우리 대화의 결론이다. 그것들에 반복이다.


한참을 쏟아내던 남편은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불쑥 꺼낸다. 그때쯤 자던 아이도 깨어난다. 아빠 품속으로 얼굴을 파묻는데 "이제는 정말 자자"는 말이 내 입에서 울분처럼 뱉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불 끄고 잘 채비를 한다. 오늘 내가 휴가를 낸 이유와 같은 이유로 남편은 내일 휴가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주말도 아닌데 그렇게 속상해서 술을 마셔댔던 것이다. 그래,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었던 거다.  


다음  아침에 일어났는데 온몸에 맞은 사람처럼 얼얼하다.  이렇게  몸이 아프지, 혼잣말을 하니 일찍  남편이 듣고는 "어제 마사지 받고 와서 그런  아니냐" 한다. 아닌데, 내가 받은  얼굴 마사지인데,  혼잣말을 한다. 우리는 하나여서 이제는  명만 아파도 같이 아픈 거다. 기쁘면 역시 함께 기쁜 것이라고.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한다. 출근길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반짝 거리는 손톱을 본다. 열을 받은 하트 파츠가 붉게 익는다. 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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