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 손으로 만든 세계.

이미화, <수어 : 손으로 만든 표정의 말들>

by 김뜻뜻
수어.jpg 사진의 배경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농학교이다. 1913년에 개교한 학교로 청각장애 특수교육기관.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숫자 100을 수어로 표현한 100주년 기념비가 보인다.



수어에서는 표정이 손동작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표정 없이 수어를 하면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P28
다만 스스로 고립시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서로의 섬에 닻을 내릴 수 있다. P76
농 자체를 문화로 바라보는 시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에 관해 장애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P92
내 글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어도 불편하게 만들 수는 있으니까. 불편함이야말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P123


영화 에세이스트인 작가가 덕심으로 수어를 배우면서 생각들을 써 내려간 책이다. 책을 통해 수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수어는 한국의 제2 언어로, 2016년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로 인정받았다. 그에 따라 '수화(手話)'에서 '수어(手語)'로 변경되었다. 언어를 사용한 문화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를 알게 되자, 수어를 배우는 것이 단순한 언어 학습이 아닌, 농인의 문화를 배운다는 것으로 생각이 확장되었다.


지난달 캠핑장에 방문했을 때 옆 사이트에 농인 가족이 입실했다. 총 네 명으로, 부모님으로 보이는 중년의 부부와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듯 보이는 아들과 딸이었다. 그 중 딸은 코다로 보였는데 캠핑장 사장님과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며 캠핑장 공용규칙 내용을 꼼꼼히 챙겼다. 처음에는 농인분들을 가까이에서 뵌 적이 없어서 그들의 행동에 적잖이 놀랐다. 그들은 뜻이 있는 말이라기보다 함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수어로 서로 바삐 이야기하며 텐트를 피칭하기 시작했다.


코다(CODA)는 농인 부모를 둔 청인을 말하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어이다. 수어가 외국어처럼 쉽게 배우고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농인 부모와 세상 사이 유일한 소통창구는 코다가 될 것이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코다>의 내용이 그러했다. 듣지 못하는 음악을 하는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와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코다 딸의 이야기로 '듣지 못한다는 것'이 가족 사이에도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떠올려본다. 오직 내가 알고 있는 단어들을 통해서만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농인과 청인이 동일한 한국 문화에서 공존하기 위해서 더욱 수어가 중요해진다. 수어는 일반적인 선형적, 시간적인 언어와 다르게 3차원 공간을 활용해서 동시적, 다층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표정과 손을 함께 사용하여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한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수어를 하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수어는 얼굴과 마음의 근육을 사용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청인이라면 잘 쓰지 않았던 얼굴근육을 정성스럽게 사용해야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수어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만든 언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 괜찮다며 내색하지 않았던 것들이 투명한 물속 작은 물고기처럼 완연하게 드러난다. 새끼손가락으로 턱을 두 번 두드리는 괜찮다는 수어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가짜 표정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작가는 "자기 자신의 변화라는 최초의 진정한 변화가 있어야 다른 변화가 뒤따르기 시작한다"라는 이탈로 칼비노의 말을 빌리며 수어를 배움으로써 사회의 변화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지평선을 넓혀나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글로 인해 수어의 매력에 빠져서 나의 세계도 확장되었다. 페테 비에리가 <자기결정>에서 말한 교양의 힘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책을 덮고 수어를 배우기 위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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