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이치, <파크 라이프>
파문이 번지는 연못, 이끼 낀 돌담, 나무, 꽃, 비행기구름, 그런 모든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상태는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고 뭔가 한가지, 예를 들면 연못에 떠 있는 물새를 본다고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진 물새가 물새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P30)
낮에는 분명 그곳에 있었던 연못에서 빛깔만 빠져나가고 없었다. 여름철에 베개를 돌려 벨 때처럼 서늘한 공원 산책길을 걷고 있자니 몸에서 술로 달아오른 열기가 빠져나갔고, 딱히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은행나무 가로수를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계속 걸어갔다. (P100)
기분 좋은 아침이었고 하늘은 저 너머 우주까지 느껴질 만큼 푸르렀다. (P105)
일본 팝 문학의 대표 작가인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집 <파크라이프>는 제127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으로 국내에 요시다 슈이치라는 사람을 처음 알린 작품이다. 내용은 주인공이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된 후 공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실제 지명을 사용한 소설로,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담백하게 풀어놨다. 특별한 것 없는 하루의 이야기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의 세밀한 풍경 묘사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장강명 작가의 <책 한번 써봅시다>에서 추천한 책이다. 사물이나 풍경을 묘사하는 일이 서툴러 고민하던 차에 교본이 된 것이 이 책이라고 했다. 묘사가 길게 이어지는데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 <파크라이프>가 궁금해졌다. 100페이지의 짧은 소설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려고 봤더니, 놀랍게도 포스트잇이 붙은 문장들은 모두 풍경 묘사였다. 덕분에 도쿄 히비야공원에 가본 적 없지만 마치 가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작가는 공원의 풍경 묘사뿐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세밀하게 담아냈다.
공원으로 오는 이유를 묻자 곤도씨는 "그렇잖아, 공원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누구도 책망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이 말이 와닿는다. 사회에서는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끊임 없이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살아가는데. 적어도 공원에서는 그 기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딴짓을 하더라도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공원에서는 꽃과 나무 같은 자연과 그 속을 각자 걷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의 형태만 시야에 보일 뿐이다. 그래서 공원에서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는 무엇이든 쉽게 변하고 쉽게 일그러진다. 스멀스멀 피어오른 불안은 고요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며 확신의 위치를 옮겨버린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다. 공원에는 산책길을 따라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의자들이 늘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져 있고, 늘 펴있는 이름 모를 꽃들과 늘 짙은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 늘 야쿠르트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공원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작가의 글을 통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버렸을 일상적인 공원의 모습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예사로운 일들이 깜짝 놀랄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날이었다. "공원 벤치에서 오랜 시간 멍하니 있다 보니, 풍경이란 실은 의식적으로만 볼 수 있는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 문장 덕분에 풍경을 의식해서 보게 되었는데, 그러자 마치 풍경들이 ‘내 앞으로 폴짝 뛰어오는 것’ 같았다.